각인

그리고 비와 눈

by 무비 에세이스트 J

어제 간만에 눈이 왔다.

최근 드라이해진 겨울의 경향 탓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펑펑 내리는 눈에 가만있을 수 없어 얼른 뛰쳐나가 한참을 눈과 교감하는 시간을 가졌다.


눈을 뒤집어쓰고 집으로 향하며 문득 나란 사람을 이루는 핵심성향에 비와 눈이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든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난 여름이면 거센 장맛비를 기다리고 겨울이면 펑펑 눈을 기다린다. 둘 다 목이 빠지도록.

봄, 가을과는 달리 계절의 특성에 하늘이 직접 개입하는 두 계절, 여름과 겨울. 이런 생각에서인지 장맛비와 펑펑 눈을 직접 맞을 때마다 난 내가 마치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자인 것만 같았고, 남몰래 이 중차대한 신비한 임무를 반드시 수행하는 사람인 것만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니 장맛비와 펑펑 눈이 오면 난 무조건 뛰쳐나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난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걸까? 나 자신조차 진지하게 되짚어보지 않았던, 당연하게 여겨왔던 나의 특성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일단 눈부터 가보자면, 왜냐하면 눈에 대해서는 비교적 명확하게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눈과 내가 신비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던 때는 내가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나는 펑펑 눈이 오는 어스름한 저녁에 동네의 야트막한 뒷산에 있었고, 아무도 없는 적막한 그 산이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가던 그 모습에 압도당했었다. 왜 갔는지, 혼자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어린 내가 느꼈던 그 고요한 신비로움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것이 눈이 나에게 각인된 최초의 사건이다.


그런데 비는 눈과 달리 정확한 시초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난 매우 예민한 어린이였으니 분명 이것도 어린 나이에 시작되었을법한데 눈처럼 각인되어 뇌에 찍혀있질 않아 안타깝다. 다만 보통 장마가 시작된 후인 6월 말에 내 생일이 있어서 중고등학교 때는 장마철과 기말고사 준비기간이 겹쳐있어 짜증스러웠던 것도 같고, 대학교 때는 방학이라 친구들을 만날 수 없어 나를 이때 낳아주신 부모님을 살짝 원망했었던 것 같다. 이 모든 시기를 지나 비가 나에게 최초로 각인되었다고 기억하는 시점은 대학시절이었다. 신입생이었던 나는 당시 친했던 선배들과 여름 계절학기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장맛비가 마구 쏟아지던 어느 날 우리 셋은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장맛비를 뚫고 대학로의 아담한 카페에 가서 핸드드립 커피와 수제 케이크를 먹으며 비를 구경했었다(물론 왜 거길 갔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그날 나에게 비는 볶은 커피와 갓 구운 빵냄새, 비가 내리치던 작은 창, 그리고 비를 맞은 우리 몸에 가득 배어있던 비내음과 함께 강렬하게 다가왔고 그 후 비는 내 인생의 중요한 요소로 각인된 것 같다.


일단 비와 눈에 각인이 되고 나자, 마치 영화 <트와일라잇 사가>에서 늑대소년 제이콥이 벨라에게 각인되어 벗어날 수 없었듯, 나 역시 비와 눈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벗어나기를 원한 적도 없었다. 비와 눈을 만날 수 없어 애간장이 타고 살짝 우울해질망정 비와 눈은 나의 감성에 절대적인 지표니까 말이다.


간만에 펑펑눈을 만났으니 이번 겨울 내 미션은 절반은 해낸것 같다. 아직 절반이 남았으니 한두번은 더 찾아와야잖아? 온 몸에 뒤덮힌 눈을 털며 대문을 들어설 수 있다는 이 행복. 눈과 내가 함께 한 한밤의 데이트. 기다린다, my dear friend, s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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