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녀의 나, 아니 나의 그녀

by 무비 에세이스트 J

수술한 지 이제 두 달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부쩍 목에 통증이 오는 것 같아서 병원에 갔다. 이전의 글에서도 밝혔듯이 나의 가슴은 웬만한 새 부럽지 않은 새가슴이라, 혹시나 하는 재발의 두려움으로 한 달 뒤 오라는 박사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간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그녀가 서있었다.


사실 그녀도 일 년여 전에 같은 병원에서 갑상선 수술을 했던 터라, 여전히 정기적으로 추후관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사전에 약속도 없던 만남에 그녀도 나도 다소 놀랐다. 그러나 나에게 더욱 놀라왔던 것은 유난히 지치고 작아 보이던 그녀의 모습이었다. 바람 때문에 체감온도가 떨어진 쌀쌀한 저녁 기온이 가뜩이나 추위에 약한 그녀를 위축시킨 걸까? 오늘 무슨 힘든 일을 겪고 온 걸까? 성대 수술 이후 나의 성대를 중심으로 우주를 재편한 나는, 나 이외의 다른 존재가 우주에 공존하고 있음을 철저하게 잊고 살고 있었다.


나보다 작은 키, 나보다 작은 몸집, 마스크 안에 갇힌 듯 보이는 작은 얼굴. 매사에 융통성이 없을 만큼 철두철미한 그녀답게 양손 가득 미처 흡수가 덜 된 소독약이 번쩍이고 있었다. 나란히 앉아 차례를 기다리며,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문득, 나의 한 팔 안에 그녀가 들어올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렇게 작았나?


그녀의 수술 이후, 내가 그녀에게 괜찮냐고 몇 번이나 물었더라? 식탁 가득한 약 중에 갑상선 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나 했었던가? 갑상선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일들이 뭐가 있더라? 내가 그렇게나 눈알이 빠지도록 찾아 헤맸던 성대폴립에 관한 지식의 백만분의 일만큼도 난 갑상선을 알기 위해 쏟아본 일이 없었다.


나의 병, 나의 아픔에만 온통 집중해 있던, 아주 이기적인 나는, 차분히 차례를 기다리며 말없이 내 옆에 앉아있던 작아져버린 나의 그녀를 바라보며, 한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난 정말 나쁜 기집애구나. 진짜 나쁜 기집애.


마스크 덕분에 그리고 나의 망가진 성대 덕분에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나의 마음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차례대로 검진을 마치고, 나란히 약국에서 처방받은 약을 조제한 후, 그녀와 나는 병원 앞에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헤어졌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21살 때였을까, 은행나무의 단풍잎이 눈처럼 수북이 쌓여있던 날, 그 단풍잎을 눈처럼 서로에게 던지며 깔깔거렸던 눈부신 일요일 아침의 산책이 떠올랐다. 그때의 난 그저 '그녀의 나'였다.

지금의 나는 그녀가 살아온 전철 대로, 그녀가 나에게 나눠준 그 특징들을 그대로 지닌 채 살아간다. 그녀가 가진 수많은 좋은 점을 그대로 흡수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내 안에 들어온 그녀의 미덕들 덕분에 나는 그럭저럭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살갑고 다정하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나의 그녀가 어느새 작아져버렸다.


오늘부로 그녀는 이제 '나의 그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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