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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영애 씨

21세기 도시에 사는 성냥팔이 소녀들을 위해

by 무비 에세이스트 J

벌써 10시가 넘었다. 가방을 멘 오른쪽 어깨가 며칠째 찌릿거리며 아팠는데 피곤해서인지 오늘 밤에는 통증이 유난스럽다. 탈 듯이 뜨거웠던 태양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 여열이 남아 밤인데도 공기가 후덥지근 답답하게 내리누르는 느낌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원룸까지 가는 데 10여분 남짓의 거리이건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것만 같다. 주택가에 들어앉아 있어 좋아라 계약했던 원룸인데 오늘따라 그 결정이 후회막급이다. 발을 거의 질질 끌고 찌릿찌릿한 어깨를 달래 가며 간신히 원룸 건물에 도착했다. 다행히 내 집은 현관만 통과하면 코앞이다.

하루 종일 혼자서 나를 기다렸을 내 집의 도어록에 비번을 입력하고, 그렇게나 간절했던 집에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불을 켜고 가방을 내동댕이 쳤다. 중요한 거 하나 없는 이 가방이 뭐라고 나는 이걸 짊어지고 다녔나 싶다. 한눈에 모든 곳이 다 들어오는 5평 남짓한 나의 집. 그래도 다행히 2층인데다 창이 커서 채광이나 통풍은 훌륭하다. 서울에서 이만한 원룸이 있을까 싶게 아늑하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후다닥 에어컨을 켜고 써큘레이터까지 가동시킨다. 그러고 나서도 왠지 옷을 갈아입을 생각이 들지 않아 책상겸용으로 쓰고 있는 식탁에 그대로 털썩 주저 앉았다. 이 작은 방에 깃들어있는 고요함 속에서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때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무의식적으로 폰을 집어 들고 쳐다보니 7년 전 추억의 사진이 알람으로 들어와 있었다. 7년 전 나라고? 마뜩잖게 핸드폰 잠금을 열고 사진첩을 열어보았다. 바닷가에서 웃고 있는 내 얼굴이 먼저 들어온다. 아 그때 저 옷을 좋아해서 많이 입었었지. 얼굴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네. 다음 사진을 보니 체코 맥주가 유행이라고 친한 애들과 몰려가서 찍은 사진이었다. 내 앞에 있는 사진 속 두 사람은 이 사진 이후 사귀다가 이제는 남남이 되어버렸다. 고작 7년 사이에 그런 일들이 있었단 생각에 씁쓸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사진을 계속 넘겨보았다. 좋아하던 풍경, 이제는 초등학생이 된 조카들, 사랑하는 사람, 잠깐잠깐 다녀왔던 여행지들, 맛있다고 먹으러 다녔던 음식점들. 그렇게 적막한 내 방 구석에서 턱을 괴고 앉아 사진을 들추어 보다가 갑자기 한 장의 사진에 난 숨이 멎을 뻔했다.

아. 영애 씨다. 나의 영애 씨. 부채를 들고 웃고 있는 그녀의 주름 가득한 얼굴이 흔들거리며 찍힌 한 장의 사진. 나는 두 손가락으로 화면을 확대해 보았으나 움직이는 그녀를 찍은 탓에 아무리 확대해도 그녀의 얼굴은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잘 보이지도 않은 그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배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쌓여있던 그리움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것일까. 그녀는 내가 너무나 사랑했던 나의 할머니, 영애 씨였다.

대학교에 입학할 때 즈음 같이 살게 된 할머니를 나를 비롯한 손자들은 영애 씨라고 불렀다. 영애는 그녀의 이름이다. 태어나서 그녀를 인지하면서부터 나에게는 할머니로 존재했던 영애 씨. 어릴 때는 영애 씨에게 태어날 때도 할머니로 태어났냐고 놀려서 혼도 많이 났었다. 지금 어린애들도 나를 보며 내가 태어날 때부터 어른으로 태어났을 거라고 생각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스쳤다. 명절과 제사 때만 보던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지만 그녀와 내가 특별해진 것은 내가 취업준비를 하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면서부터다. 나와 할머니가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있게 되니 자연스레 부딪히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한국사 시간에나 배웠던 근현대사의 시간을 모두 살아오신 할머니의 경험담은 수 없이 반복해서 들으면서도 신기하고 놀랍기만 했고, 손녀-할머니간 수다의 하이라이트는 할머니표 감자였다. 껍질을 벗겨 삶아낸 감자를 낡은 프라이팬에 넣고 소금과 설탕을 절묘한 비율로 뿌려 기름에 이리저리 굴려서 먹는 할머니표 감자는 천상의 맛이어서 입천장 다 데어가며 먹어도 억울하지 않은 맛이었고, 할머니와 호호 불어가며 한 여름 선풍기 바람에 땀 흘리며 먹던 그 맛은 그 이후 단 한 번도 맛볼 수 없었다. 안다. 할머니가 없기 때문이지.


흐릿한 사진 한 장에 그녀를 잃고 살아온 지난 시간들 속에서 내가 잃은 건 그녀 뿐 아니라 그 천상의 감자 역시 잃어버렸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나는 이제는 똑바로 앉아 핸드폰 사진첩을 뒤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영애 씨 사진이 더 있을 텐데. 내가 직접 찍은 것도 몇 장 있었는데 말이지. 그렇게 찾다 보니 어린 조카를 등에 업고 현관에 서있던 영애 씨의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아. 그 사진을 보니 할머니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던 게 떠올랐다. 억척스러웠던 그녀의 삶이었는지라 평생 절약이 몸에 배어있던 할머니는 날씨가 더워도 절대 물 한 통 사 먹는 법이 없었다. 한 여름에 밖에서 들어오시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한 컵 드시고 시원하다며 그제야 밀린 갈증을 떨쳐내고 행복해하시던 분이었다. 그런 할머니의 억척스러운 궁상맞음에 짜증이 났던 나는 한꺼번에 열개씩 아이스크림을 사다가 냉동실에 넣어두면서 할머니에게 엄포를 놨었다. 이거 열흘 후에 검사해서 남아있는 거 있으면 삐질 거라고. 당연히 할머니는 드시지 않았고 나는 삐진 척하면서 할머니에게 억지로 아이스크림을 권했다. 할머니는 마지못해 한 개씩 드셨지만... 세상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 때문에 나는 여름 내내 할머니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드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영애 씨가 저렇게 행복해하는데 이깟 아이스크림이 뭐라고 하면서. 지금 나의 원룸 냉동실에 몇 개 뒹굴고 있는 아이스크림 역시 그녀와 마주 앉아 먹던 그때의 맛은 절대 아니다. 그녀가 없으니 당연하다. 작은 내 식탁에 눈물이 고인다. 영애 씨와의 사진 한 장 한 장마다 나를 애기라고 불러주었던 그녀와의 농축된 추억이 쏟아진다. 오늘 하루, 최근 몇 년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일들이 그녀의 사진 위로 내 눈물에 섞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또 다른 사진을 찾았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이었다. 그 사진에는 티눈으로 고생했던 그녀의 발이 두드러지게 찍혀있었다. 영애 씨는 오랫동안 엄지발가락에 난 티눈으로 고생했다. 티눈이 너무 커져서 신발을 신거나 걸을 때조차 영애 씨를 고통스럽게 했기 때문에 약도 바르고 먹는 약을 복용하기도 했지만 좀처럼 티눈은 나아지지가 않았다. 집에서는 모두 수술하시라고 권했지만 할머니는 돈 쓰지 말라고 화를 내면서 고집스럽게 약국에서 티눈 약을 사다 바르시며 손톱깎이로 조금씩 잘라냈다. 그래서 그녀의 발 한쪽에는 항상 하얀 티눈 약이 발라져 있었고 나는 할머니한테 백 미터 밖에서도 발만 보면 할머니를 찾을 수 있겠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내가 마지막에 그녀를 보았던 영안실에서 눈을 감고 누워있던 그녀를 보았을 때도 나는 그녀의 발부터 보았다. 우리 영애 씨가 나를 두고 가실리가 없으니까 나는 발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리고 거기에 그녀의 발이 있었다. 아직도 못다 없앤 하얀 티눈 약이 베어있던 그녀의 투박한 발이. 나는 그제야 그녀가 더 이상 내 곁에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 발은 세상없어도 나의 영애 씨 발이었으니까.


사진이 더 이상 없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나에게 사랑을 주었던 나의 영애 씨에게 나는 너무 무심했다. 수천 장의 사진 속에 그녀의 사진이 이렇게 밖에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나는 나쁜 애기였구나. 할머니 당신이 그렇게나 사랑해주고 아껴주었던 당신의 애기는 참 나쁜 애기였어요. 가시기 전까지 그렇게 사랑해주셨는데 제가 해드린 것이 너무 없었어요. 당신이 너무 그리워요. 앞니 빠져 웃던 그 해맑던 당신이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할머니...

사진 몇 장을 번갈아가며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녀가 없던 지난 세월 마음껏 그녀를 그리워하지도 않았던 나의 야박함을 질책하며, 나를 그토록 사랑해주었던 그녀의 사랑스러운 주름을 다시 한번 어루만져보고 싶은 절실함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고개를 들고 시계를 보니 이미 11시가 훨씬 넘어 자정에 이르고 있었다. 홀로 앉아있던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없는 현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한기가 느껴져 리모컨을 찾아 에어컨을 껐다. 핸드폰 사진첩을 닫고 나의 사랑하는 영애 씨를 다시 나의 추억 속에 담아둔 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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