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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그랬을거다

by 무비 에세이스트 J

저녁을 먹고 식당에서 나오는데 바로 옆 건물에서 조그마한 여자아이 둘이 나오더니 내 앞을 지나쳐갔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꺄르륵 거리는 아이들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니, 학원 건물 입구에 서 있는 남자아이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아이는 좀 전에 나갔던 두 여자아이를 몰래 바라보며 들킬세라 조심스레 몸을 감추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저 녀석... 그 둘 중 한 명을 좋아하고 있는 건가?


호기심에 잠시 멈춰서 남자아이의 초조하고 상기된 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자아이는 먼저 나온 여자 아이들이 한참을 앞질러 가고 나니 조심스럽게 건물에서 나와 그 뒤를 따라갔다.


지금 저 남자아이의 지상 최대의 고민은 무엇일까? 짝사랑으로 인한 초조함과 설렘일까?

나도 모르게 그 들의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남자아이는 둘 중 누구를 좋아하는 걸까? 긴 머리소녀? 머리를 묶어 올린 소녀? 남자아이의 분위기로 봐서는 왠지 긴 머리 소녀일 것만 같았다. 기껏해야 초등학교 4-5학년 정도의 세명의 아이들을 가지고 나는 소설을 쓰고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횡단보도에서 잠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자니, 나 역시 그 남자아이만 할 때 같은 고민이 지상최대의 과제였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숙제보다 중요하고, 아침보다 중요했던 언젠가의 날. 다른 무엇보다 내 감정과 욕망만이 나를 괴롭히고 들뜨게 했던 그때.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 그 시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눈 발 사이로 보이는 것도 같았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던 시절, 나의 가치와 이상만이 나를 사로잡고 내 눈을 멀게 하던 그 시절.

어른이라는 두 단어가 막연히 머나먼 세상에 속해 있다고 자만하던 시절.

나는 결코 어른들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그들과 거리를 두던 시절.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 그 시절이 손에 잡힐 것도 같이 그려졌다 이내 사라져 버렸다.

나도 그랬었는데... 정말 그랬었는데...


그랬었다는 미약한 확신은 횡단보도를 채 다 건너기도 전에 그랬었을 거라는 강한 추정으로 바뀌었다.


확신과 추정의 사이 그 가운데에서 힘의 균형을 잃어버린 밤.

남자아이의 두근거림이 아련한 음악처럼 그리움으로 퍼져 나가는 밤.


점점 많이 내리기 시작한 눈을 맞으며 그랬을 거라는 추정의 손을 결국 비겁하게 들어주고 난 후

누가 볼세라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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