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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Dec 04. 2023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지은이 이상희, 엘리 (2023)

이 책의 저자인 이상희 작가님의 북토크에 다녀왔다. 

작가님에 대한 어떠한 사전 지식도 없이 그저 북토크의 장소가 내가 좋아하는 북카페 겸 출판사였기에 찾아간 것이었다. 


북토크를 까맣게 잊고 지내다 캘린더에 동그라미를 쳐놓은 것을 전날에서야 확인하고 당황했다. 작가의 책을 찾아보지도 않고 가게 됐으니...


도착해 보니 작가님과 그녀의 남편은 이미 자리에 앉아계셨다. 조금 달라 보이는 남편분의 모습과 유난히 따뜻해 보이는 미소로 참가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는 작가님을 보며,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담아놓은 이야기의 색과 온도를 예측해 보았다.  


 따뜻한 블루 혹은 차가운 레드이지 않을까 하고. 


그날 저녁, 북토크가 끝나고 현장에서 작가님의 싸인이 든 책과 남편분이 그렸다는 작은 해바라기 그림 사진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내내 난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무언가가 내 안에 다시 들어차고 있는 것을 느꼈다. 


가슴과 머리가 모처럼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


그 오래된 낯선, 반가운 느낌 때문에 난 내가 어디를 지나치고 있는지 알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이상희 작가를 만나고, 그녀의 이야기를 접한 것은 지금의 나에게 일어나야 할 가장 필요한 사건이 가장 정확하게 발생한 것만 같았다. 






이 책은 그녀가 남편을 간호하며 써 내려간 간호일기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한다. 

왜 그녀는 남편을 거의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온갖 병원에서 24시간 붙어있다시피 하며 간호를 해야 했을까?


대학에서 선후배사이로 만난 그들은 (남편이 7살 연하인 후배다) 5년간의 연애 후 결혼하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쳤던 작가와 컴퓨터로 작업을 하는 회사에 다니던 남편은 그들만의 보금자리에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 생활은 3년을 넘기지 못했다. 어느 날 남편이 퇴근 후 머리를 차에 치이는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가와 남편의 이야기는 바로 이 사고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치명적이었던 남편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작가는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온갖 병원에서 온갖 수술과 치료를 받아야 했던 남편을 돌보게 된다. 뇌에 치명상을 입었기에 신체의 많은 기관이 동시에 손상되어 버려 회생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남편은 결국 그 시간을 작가와 함께 이겨내며 2년 여가 지난 후 퇴원을 할 수 있었다. 


간신히 목숨을 구했으나 불행하게도 영원히 앞을 볼 수 없게 된 상태로...   


남편은 치매증상과 비슷하게 기억을 부분적으로 영구히 상실했고(신혼여행의 기억도 없다고 한다), 언어기능이나 팔다리의 기능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끝없는 재활치료를 해야 했다. 현재는 완전치는 않지만 훨씬 좋아진 상태로 지낸다(사고 후 4-5년이 지났다). 


책의 말미에는 남편이 쓴 짤막한 글도 실려있다. 그 짧은 글을 위해 부단히도 노력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한 자 한 자 마음을 담아 썼다고 한다.


책을 마지막까지 다 읽고 책을 덮고 나니 북토크에서 보았던 밝은 모습의 그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오히려 이번 북토크에 책을 읽지 않고 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감정과 생각에 갇히지 않고 난 그들을 나 같은 보통의 사람들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가도 밝혔지만, 이 책은 보는 이를 슬프게 만들려고 쓴 책이 아니다. 오히려 커다란 상실을 겪고 새로운 모습과 마음가짐으로 삶을 다시 찾아낸 이의 실제적 경험을 통해, 지금 우리가 어떤 마음과 모습으로, 어떤 태도로 삶을 대하고 바라보는지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준다. 


또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수많은 스트레스와 힘듦을 좀 더 커다란 그림 속에 넣어 축소해 줌으로써, 사사롭게 일희일비하고 있는 작고 좁아진 우리의 시야를 확 트이게 만들어, 우리의 시선을 비루한 현실의 장에서 거두어 좀 더 높고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이상희 작가는 말솜씨처럼 글솜씨 또한 훌륭하다. 문장 하나하나가 정확하게 솟아올라 막힘없이 흘러간다. 





여전히 내 고통밖에 모르던 나, 아직도 힘들다고 숨고 싶어 하는 나,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없는 나. 남의 행복에 냉소하는 나. 상처를 떠올리며 분노하는 나. 수많은 이런저런 나, 나, 나.


이제 나도 이런 나에게 나만의 이야기를 부여할 때가 왔다는 뜨거운 무언가가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사랑을 믿고, 사랑을 의심하고, 그러나 결국 사랑에서 자신을 발견하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작가의 지난했던 발걸음을 토닥인다. 

 

그녀의 유려한 문장들과 고통에서 더욱 깊어진 통찰은 앞으로 더욱 많은 작품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지평을 넓혀줄 것이다. 


이제 그녀와 남편이 딛는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지길 바란다. 그럴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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