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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Oct 14. 2024

슬픈 카페의 노래 - 카슨에게 사랑이란 무엇이었나

카슨 매컬러스(1951) 

지독하게 고독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견고한 성을 짓는다. 자신의 고독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 나약한 실제를 위장하기 위해 지은 성은 그를 외부로부터 단단하게 보호함과 동시에 외부로부터의 접근도 막아 버린다. 고독한 사람은 악순환에 빠진다. 그러나 자신의 성을 허물고 살아갈 자신도, 방법도, 이유도 없는 그는 고독이 가득 들어찬 성안에서 고독의 그림자에 갇혀 떠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보다 더 고독한 영혼을 마주친다. 비천하고 나약해서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은 상대를 바라본 순간, 그는 알게 된다. '저 사람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어떠한 일로도 나를 떠날 수 없다'. 

고독한 이의 오래된 성은 이처럼 비천한 이의 등장으로 어처구니없을 만큼 빠르게 허물어진다. 마치 언제 성이 있었냐는 듯싶게. 성이 무너지며 성안에 가득했던 고독의 기운이 빠져나간다. 고독한 이는 드디어 세상 사람들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삶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독한 이가 믿었던 비천한 이는 얼마 되지도 않아, 고독한 이의 최대 약점이 고독이라는 것을 간파한다. 이제 입장이 바뀐다. 비천한 이는 고독한 이의 약점을 움켜쥐고 주인행사를 하기 시작한다. 고독한 이도 이것을 알지만, 비천한 이가 파악했듯 고독은 고독한 이가 다시는 빠지고 싶지 않은 수렁이었다. 이에 고독한 이는 비천한 이를 사랑해 버린다. 비천한 이가 자신에게 횡포를 가할수록 그를 더욱 사랑한다. 그러나, 고독한 이는 몰랐다. 이 사랑이 자신을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참담한 고독으로 밀어 넣으리라는 것을.


고독한 이가 내린 가장 최악의 결정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고독을 걷어내기 위해 자신을 더욱 고독 속에 밀어 넣게 되는 일방적인 그래서 자학적이 되고 마는 사랑이었다. 


작가인 카슨 매컬러스의 삶을 살펴보면 왜 이다지도 감성의 결정체인 사랑을 이성의 영역에 두게 되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녀는 20살에 만난 남자와 결혼, 이혼, 결혼을 반복했고, 남편과 동시에 한 사람을 사랑했는가 하면, 레즈비언적 성향으로 여러 여자를 사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 이외의 다른 사람과의 사랑, 특히 여성들과의 사랑은 모두 카슨의 일방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에 카슨은 50살에 사망할 때까지 사랑받는 자가 아닌 사랑을 주는 자로서 삶을 살았다. 그러니 이토록 불완전하고 불안한 사랑만을 겪어온 그녀에게 사랑은 함께 있어서 더욱 고독을 주는 역설적인 것임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이 작품에서 단연 돋보이는 부분도 바로 카슨이 제시하는 사랑의 정의이다. 그녀는 사랑의 관계를 사랑을 주는 자와 사랑을 받는 자로 구분한다. 먼저 사랑을 주는 자에게 있어서의 사랑이다.


우선 사랑이란 두 사람의 공동 경험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동 경험이라 함은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을 주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히 쌓아온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사랑을 주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있고 있다. 


사랑을 주는 자의 행위가 단지 원래부터 사랑을 받는 자의 내면에 존재하던 사랑을 건드려 깨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그녀는 말하고 있다. 게다가 사랑을 주는 자들은 사랑을 주면서도 이미 이것을 알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이렇게 되면 사랑을 주는 자의 사랑은 사랑을 받는 자에게는 한낱 일깨움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니 이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줄 수밖에 없는 이는 사랑을 시작한 순간부터 혼자만의 고독한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을 주는 자에게 사랑이란 함께 있어도 함께 있지 않은 별개의 세상, 별개의 경험이다. 


그렇다면 사랑을 받는 자에게 자신이 받고 있는 사랑이란 어떤 의미일까?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의 불을 지를 수 있다. 사랑받는 사람은 배신자일 수도 있고 머리에 기름이 잔뜩 끼거나 고약한 버릇을 갖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랑을 주는 사람도 분명히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지만, 이는 그의 사랑이 점점 커져가는 데에 추호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어디로 보나 보잘것없는 사람도 늪지에 핀 독백합처럼 격렬하고 무모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랑이든지 그 가치나 질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카슨의 생각대로라면 사랑을 받는 자도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누군가의 사랑을 그저 받는 대상이 되고 싶지 않을 때조차 자신의 존재만으로 사랑의 대상이 되어 그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것은 마냥 축복일 수가 없다. 게다가 사랑받는 이의 가치나 질이 본인이 아닌 사랑을 주는 이의 일방적 결정으로 정해진다면, 이것은 부담과 불편함을 넘어 폭력적 강압행위라고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이런 와중에 사랑을 주는 자에 의해 일깨워진 사랑으로 인해 이제 사랑받는 자는 사랑을 주는 자의 위치에 설 수도 있게 된다.  


그렇다면 카슨은 사랑에 있어 둘 중 어떤 사람의 손을 들어주고 있을까?   

 

그래서 우리들 대부분은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힘들고 불편하게 느낀다.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는데,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연인을 속속들이 파헤쳐 알려고 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는 아무리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능한 한 모든 관계를 맺기를 갈망한다.     


카슨에게 있어 사랑은 태생부터 고독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니,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일방적인 사랑의 대상이 되어 강압적으로 사랑을 주입받는 피해자가 되기보다는, 일방적 사랑이 스스로의 발목을 묶는 덫이 되고 말더라도 의지대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낫다는 것이다. 비록 이 과정에서 자신의 갈망이 결국 파국을 낳을 것을 알더라도 말이다.


카슨의 이런 사랑관은 소설의 뼈대가 되는 삼각관계에 그대로 적용된다. 사촌을 사랑하는 아밀리에, 마빈을 사랑하는 사촌, 아밀리에를 사랑했던 마빈의 서로 맞물린 관계에서 세 사람 모두는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입장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 들 각자가 행복을 느끼는 경우는 오직 사랑의 대상에게 사랑을 주었던 경우뿐이다. 

        


고독한 이의 사랑은 결국 자멸을 불러온다. 자신이 한때 누군가의 사랑을 매몰차게 짓밟았듯, 이제는 자신이 더욱 가혹하게 짓밟혀 영영 일어나지 못한다. 이제 고독한 이는 다시 성을 쌓는다. 다시는 열리지 않을 성, 한때 행복이 불을 밝혔던 그 성 안에서 고독한 이의 얼굴은 고독, 그것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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