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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햇살 Jan 24. 2022

저녁의 시간

나는 직접 만든 물길을 흐르는 존재

저녁의 시간


 저녁 아홉 시의 기분은 특별하다. 나는 이 시간을 살아가고 있고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느낌. 나의 길 위에서 흘러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이 시간은 시끄러웠던 곳에서 한 발 빠져나와 숨 돌리며 삶을 관망할 수 있게 한다. 아, 내가 여기에 있었지. 이 길 위를 지나는 중이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던 것 같았는데 딱 한 발자국만 떨어져 나오면 알게 된다. 나는 내가 만든 물길 위에서 헤엄치는 중이다.

 


 서울에 와서 한 일들은 분명 내가 원하던 것이었으나 즐겁지 않았다. 오늘은 수업도 빠지고 다섯 시가 다 되도록 잠을 잤다. 머무르는 숙소에는 내가 안정감을 느낄 만한 것이 많지 않다. 하나하나 고민하며 골랐던 가구와 애정 담은 물건들은 모두 속초에 있다. 이사를 많이 다녔고 이번처럼 한 곳에 한 두 달 단기로 머물렀던 경험도 많기 때문에 새 공간에 빨리 적응하려면 따뜻함과 때 묻은 물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지내는 숙소에는 내가 좋아하는 주황색 조명과 아로마 가습기가 있다. 걸어둔 이후로 악몽을 꾸지 않아 가능하면 항상 가지고 다니는 드림캐쳐도 있다. 이곳이 내 공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켜주는 것들이다. 내가 여기 있어도 마땅하다는 그런 당위성을 만들어주는 것들.


 그러나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나는 이 낯설고 때론 환영받지 못하는 기분이 드는 곳에서도 나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곧 떠날 곳이니 정을 주지 않아서 우리가 덜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바꿔 말하면 내 선택에 따라 이곳과 나는 절친한 동료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나는 이곳을 선택했고, 이곳은 나를 받아들였으며 우리는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함께 잠에 든다. 그리고 저녁 아홉 시에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본 내 삶은 이렇다. 여행자는 새로운 곳에 왔고 낯선 곳에 잠시 둥지를 틀었으며, 매일 아침 조금 긴장 기분으로 집을 나선다. 그는 놀러 온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마음에는 비장한 각오 같은 것이 있었고 이 기간을 통해 크게 도약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여행자는 이번에도 역시 같은 것을 깨닫는다. 한 번에 도약하는 꿈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모든 일은 시간이 쌓여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삶은 원래 그런 것이었지. 그래서 여행자는 여행이 끝나고 뒤를 돌아볼 때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나는 이번에도 저기에서 여기까지 이만큼이나 움직였구나.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아무리 높게 뛰어도 한 번에 한 발자국만 갈 수 있다는 걸 온몸에 힘을 빼고 인정하는 수밖에. 왜 빨리 가고 싶냐고 물은 적도 있다. 나는 그날을 기다리기 힘들 뿐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세상에 전하고, 그것이 이야기가 되는 날을 설렁설렁 걸어가며 기다리기 답답할 뿐이다. 그래서 껑충껑충 뛰지만 그 보폭이 최선이다. 다리가 2미터라서 겅-중 겅-중 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그게 어디 가능하던가? 껑충 뛰고 큰 보폭으로 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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