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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햇살 Mar 07. 2022

설루스의 마녀심판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



언니에게.


여긴 아직 두꺼운 겉옷을 입어야 하고 어깨도 약간 움츠러드는 날씨지만,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잰걸음을 걷다 보면 봄 냄새가 바람과 함께 훅 하고 날아와. 마르고 앙상하던 숲의 나뭇가지에 보송보송 털이 난 봉오리들이 피고 있어. 운 좋게 볕이 쨍쨍하게 내리는 곳을 발견하면 눈을 감고 햇빛을 몸에 가득 담아. 볕은 이마를 때린 뒤 곧 몸 전체를 따뜻하게 해. 나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어. 오래되고 단단한 나무의 뿌리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나무보다 몇 배는 크다고 하잖아. 나의 뿌리도 그렇게 이 행성과 단단하게 연결되어 두 발로 탄탄하게 서길 바라면서 발바닥에서 뻗어 나온 빛이 행성의 가장 안쪽까지 이어지는 상상을 해.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듯한 두 다리가 부디 땅에 무사히 안착하기를 바라면서.


얼마 전에 빵을 사러 시장에 들렀다가 빵집 주인과 손님들이 수군거리는 걸 들었어. 나 같은 마녀가 빵을 사 가면 그날은 재수가 없어서 장사가 안 된다나. 결국 아무것도 못 사고 그냥 나왔지 뭐야. 항상 듣는 말이지만 어떤 날에는 그런 말들이 가슴에 콕콕 박혀. 그래도 마녀라고 손가락질받는 게 다행인지도 몰라. 사람들은 내게 끔찍한 일을 당할까 봐 직접적으로 해코지하지는 않거든. 언니가 불에 타는 걸 본 사람들은 우리가 다 마녀라고 생각해.


빵집을 나오자마자 숨고 싶었는데 거리에 사람이 너무 많았어. 반짝거리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되고 낡은 외투를 입은 나는 얼굴을 가려도 눈에 띄나 봐. 사람들은 내게 거리를 두고 걸어가면서도 자꾸만 곁눈질로 나를 힐끗거려. 그럴 때면 왠지 몸이 으슬으슬 추워지는 것 같아.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빠른 걸음으로 우리 동네로 갔어. 큰 마을에서 한참 걸으면 나오는 작은 숲 속에 있는 또 다른 마을. 언니도 살았던 그곳, 설루스.


이제 설루스 사람들은 큰 마을 사람들을 위해 일해. 우리는 그 대가로 삯을 받아 생활해. 시간이 갈수록 숲이 황량해져서 먹을 수 있는 풀을 찾기도 쉽지 않거든. 끼니를 해결하려면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주는 동전이 필요해. 설루스 사람들 중 몇몇은 아예 그 사람들의 집에 머물며 심부름을 해주고 약간의 돈을 받아. 질렌 아줌마도 그렇게 일한 지 1년이 넘었어. 원래는 식사를 차리는 일만 했었는데 그쪽에서 아이들도 봐주고 정원 관리도 하도록 시켰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일이 끊길 수도 있어서 한두 번 해주다 보니 이제는 일이 너무 많아져서 여기 올 수가 없게 됐어.


언니가 떠날 때 다섯 살이었던 나디아는 이제 제법 커서 나랑 함께 일을 해. 나를 몇 년간 쫓아다니더니 이젠 혼자서도 약초를 구별할 수 있게 됐거든. 나디아가 질병을 치료하는 약초를 찾아오면 나는 그것들을 배합해서 약으로 만들어. 독한 풀을 하도 만져댔더니 이제는 손이 너무 거칠어져서 어지간한 것에는 피가 나지도 않아. 일할 때 장갑을 끼지 않은지도 오래됐어. 나는 약을 수레에 싣고 큰 마을에 가면서 매일 생각해. 사람들은 내 시선이 닿기만 해도 불길한 일이 생길 것처럼 굴면서 어째서 내가 가져다주는 약은 아무렇지 않게 먹는 걸까? 이상한 일이야.




오늘 밤은 바람 소리가 들리지 않네. 보름달이 뜨는 날이라 그런가 봐. 설루스 사람들은 일할 때 빼곤 문을 잠그고 밖에 나오지 않아. 죽어가는 숲이래도 아침엔 새가 울곤 했는데 이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동물들은 죽음의 냄새를 잘 맡으니 이 기간에는 여길 피하는 거겠지. 차라리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밤마다 빗자루를 타고 온갖 마법을 부리는 능력이 있었다면 이렇게 손 놓고 앉아만 있진 않았을 텐데.


편지를 쓰면서도 손이 덜덜 떨려. 세상이 온통 조용한 게 낮인데도 달이 떠 있던 그날 같아. 한쪽에는 태양이, 다른 한쪽에는 보름달이 떠서 붉은색과 허연 색이 어지럽게 뒤섞이고 땅이 내는 소리 없는 비명이 세상을 꽉 채우는 것 같았던 그날. 이고 가던 짐이 점점 무겁게 느껴져서 어깨가 아플 때쯤에 질렌 아줌마가 큰 목소리로 말했잖아. 날이 예사롭지 않으니 짐을 풀고 여기서 며칠을 보내자고. 사람들이 짐을 내리면서 저마다 걱정하는 말을 했던 것 기억나? 몇 개월에 한 번씩 거처를 옮기며 사는 우리들도 그런 건 처음 봤던 거야. 그때만 해도 백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함께 했는데, 지금은 겨우 스무 명 남짓만 남아있어. 일부는 죽었고 일부는 달아났어. 대부분은 죽었지.


그때 우리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각자가 할 일을 아는 것 같았어. 나는 주변의 나뭇가지를 모아서 불을 피우는 역할이었어. 질렌 아줌마가 다른 사람들과 천막을 치는 동안 언니는 먹을 것을 찾아 숲 밖으로 나갔던 게 기억 나. 태양이 지고 보름달만 덩그러니 남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언니는 알까? 호기심이 많고 용감한 언니는 자주 이리저리 쏘다니곤 했지만 그날만큼은 빨리 돌아왔다면 좋았을 텐데.


불도 다 피웠고 밤을 지새울 준비를 모두가 끝냈을 무렵에 쿵쾅거리는 한 무리의 발소리가 멀리서 들리기 시작했어.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사람들의 말소리도 섞여있었어.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보니 횃불을 든 사람들이 화가 난 표정으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 사람이 그렇게 흥분한 모습은 처음 봤어. 행렬은 아주 길게 이어지는 것 같았고 끝이 보이지 않았어. 그래, 그때 언니를 발견했어. 횃불을 든 사람들 사이에 잡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던 언니. 예쁘게 땋았던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져있었고 얼굴은 피와 멍, 하얀 반점이 서로 엉켜있는 것처럼 보였어.


횃불 든 사내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기억 나.

‘고장 난 자들은 용납할 수 없다.’


설루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어. 그 사내의 눈에는 우리가 모두 '하얀 반점이 얼굴에 있는 고장 난 존재'로 보였겠지.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나 봐.

하지만 우리가 뭘 잘못했지? 우린 그냥 그곳에 있었을 뿐이야.


성난 사람들 사이에 있는 언니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어. 언니를 살려달라고 싹싹 빌었더니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지. 인간이라면 신이 반점을 없애 고쳐주실 것이고, 마녀라면 죄를 물어 불태워 죽일 것이라고. 그리고 언니를 끌고 가 그대로 불에 얼굴을 밀어 넣었어. 잔인하기도 하지. 따뜻한 밤을 함께 보내려고 내가 피웠던 불이었는데.


그 뒤로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그들은 횃불을 들고 찾아와서 우리를 심판해. 불에 닿아 하얀 반점이 사라지면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불에 타 죽으면 사악한 마녀가 돼 버리는 엉망진창인 기준을 가지고 말이야. 그런데 언니, 이제는 가끔 헷갈려. 우리가 죽는 건 정말 우리가 고장 났기 때문은 아닐까?


매년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심판을 기다려야 하는 게 끔찍해. 이번에는 누가 불에 타 죽게 될까. 나디아일까? 옆집 부인일까? 아니면 나일까?

하지만 그게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어. 우리는 거의 같은 걸.


그래서 말인데, 불에 타 죽기 전에 내가 먼저 불을 내는 건 어떻게 생각해? 사실 오늘 낮에 큰 마을에 가져다 판 약에 독초를 섞었어. 오래 살겠다고 매일 약을 마셔대는 사람들이니 아이들을 뺀 모두가 먹었겠지. 유일하게 나와 말을 섞어주었던 약재상 아저씨는 살려줄까 싶어서 약을 주기 전에 슬쩍 말을 걸었어. ‘큰 마을 사람들은 왜 나를 마녀라고 생각하죠?’ 내 물음에 아저씨가 이렇게 말하더군.

‘우리는 자네가 마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네. 나를 용서하게.’

아저씨는 참 운도 없지.


독초를 쓰는 건 처음이라 마신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잘 모르겠어. 조용히 죽게 될 수도 있고 목이 불에 타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죽을 수도 있어. 누가 죽고 살았는지는 오늘 밤에 큰 마을 사람들이 오는 시간이 되면 알게 되겠지. 이쯤 되면 그들이 도착했어야 하는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네. 쿵쿵 북소리와 불에 그슬린 나무 냄새가 나야 하는데. 너무 조용해.






한참을 기다렸는데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았어. 설루스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밖을 살피는 게 보여.


언니, 아마 나는 이 사람들을 지킨 것 같아.

설루스 사람들은 영원히 저주를 내리는 마녀기억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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