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나약해져서 많은 것들에 품을 내어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활어가 주는 싱싱함 덕분에 졸리던 눈이 떠지는 순간이었다. 가족들의 대화에도 생기가 돌았다. 꽃게탕을 해 먹기로 했다. ‘그 맛있는 꽃게탕이라니! 게다가 이렇게 게가 많지 않은가! 아! 그 짭쪼롬하고 구수하고 큼큼하게 맛있는 국물과 부드럽고 하얀 속살을 모자람 없이 먹을 수 있다니! 노르스름한 내장이 붙은 등 껍질에 밥을 몇 번이나 비벼 먹을 수 있고, 한참 갖고 놀 수 있는 큰 집게 발을 몇 개나 내 소유로 할 수 있다니!’ 아무도 모르게, 실은 나도 모르게, 미소를 만들고 있는 순간, 아빠가 한 밤 중에 요리를 시작했다. 개수대를 마주하고 선 아빠의 뒷 모습이 정말 멋있고 든든했다.
아빠의 칼은 살아 있는 꽃게를 내리치고 있었다. 딱딱한 껍질 때문에 단번에 갈라질 리 없는 꽃게는 몇 번을 칼로 내리쳐야 했다. 그러면 게는 어느 때보다 더 힘차게 파닥거렸다. “탕탕탕” 매서운 소리와 집게 발로 개수대를 두드리는 “탁탁탁”의 합주. 그리고 그것은 ‘탁탁탁’이 ‘톡톡톡’으로 잦아드는 독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아빠 뭐해? 꼭 그렇게 해야 해? 기다리면 죽을 거 아냐!” 아빠는 대답이 없었다. “엄마, 너무 잔인..” “아빠 일하시잖아 조용해봐.” 아니,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나만 빼고 모두 괜찮다는 말인가? 저렇게 파닥거리는 게를 보고도 아무 감정의 동요가 없다는 말인가! 내가 알던 따뜻한 엄마는 어디로 간 건가? 학교도 안 간 동생 너는 모른다 치고. 아직도 많은 게들이 ‘탕탕 탁탁 톡톡’을 반복할 생각을 하니 도대체 평화롭던 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휙하니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모두 그 야만적인 과정에 집중하느라 나따위는 신경 쓸 여유도 없을 테니. 개수대를 마주하고 선, 마흔쯤된 남자의 등, 힘을 주면 솟아오르는 오른팔의 핏줄이 너무 완고했다.
하지만 그 달큰하고 구수한 것을 내 자리에만 놓지 못하게 했다. “쟤는 게 잡는 게 잔인하다고 안 먹는데요.” “별일이다” 엄마와 할머니가 나누는 대화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독립투사라도 된 듯이 상의 구석에 꼿꼿이 앉아서, 붉은 꽃 잔치가 벌어지는 밥상에 눈도 안 돌리고 하얀 밥만 꾸역꾸역 입에 넣다가 보란 듯이 일어났다.
아무도 없었지만, 가을 오후 노란 빛을 한껏 끌어 앉고 졸고 있는 집안 공기는 따뜻했다. 기분 좋게 집을 훑는데 부엌 가스레인지 위에 꽃게탕이 있는 검은 냄비가 보였다. ‘쳇, 도대체 얼마나 많이 끓였길래’ 내 느낌에 꽃게탕은 꽤 많은 끼니에 오르는 듯했다. ‘그냥 한번 뚜껑만 열어볼까? 게를 반으로 완전히 가른 건가? 그럼 게 등껍질에 밥을 못 비벼 먹을 텐데.’ 정말 단지 그게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확인한 것은 미칠 듯이 맛있는 냄새였다. 아, 내가 모르던 시원한 냄새. 나는 마루에 누웠다. ‘도대체 저 냄새가 무엇이란 말인가? 가족들이 맛있게 먹던 소리. 어쩌면 그 많던 것이 거의 남지 않았던데. 다들 그렇게 잘 먹는데, 왜 나만 다른가! 이렇게 안 먹는다고 나한테 남는 게 뭔가? 그럼 살점만 안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나만은 잔인한 과정에 동참하지 않겠다던 게들과의 약속. 하지만 국물만이면 괜찮은 거 아닌가?’ 나는 어느새 숟가락을 들고 검은 냄비 앞에 서 있었다. 부서져서 국에 부유하던 게 살점이 하나라도 올라가지 않도록 조심히 국물 한 숟가락을 떴다. 호로록. 몇 번 끓여 낸 국물은 되지막한 느낌마저 있었다. 달큰하게 시작해서 시원하더니 쫍짤한 구수함으로 점을 톡 찍었다. 게의 맛있는 것이 다 녹아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꽃게탕 국물 한 숟가락을 넘기자, 목이 메였고, 눈물이 났다. 나는 실망하고 말았다.
더 맛있게 먹겠다고 살아 있는 것을 단숨에 내리치던 인간의 욕심에 항거하던 나, 모두가 더 달라고 할 때, 혼자 안 먹겠다고 외치던 당당한 나, 그런 내가 먹고 만 것이다. 게다가 차가운 탕인 주제에 그렇게 맛있다니. 도대체 미워해 마지않던 가족들과 내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저는 나약한 인간입니다. 꽃게탕 국물을 한 입 먹고 말았습니다. 저희 때문에 죽은 꽃게들을 돌보아주시고 저를 용서해주소서!” 꽃게탕을 한 입 맛 본 열 산 난 여자 아이의 볼에 눈물 길이 나고 말았다.
없어서.
이제 산낙지를 즐기는 그야말로 어른이 되었다. 움직이는 것을 어렵게 젓가락으로 집어내는 것부터 재미요. 입속에서 빨판의 흡착력을 느끼는 것은 별미다. 이것을 다 안 씹고 삼키면 뱃속에서 어떻게 되는 지 궁금해 하는 것은 매번 느끼는 흥미다. 산낙지를 시켰는데 움직이지 않으면 별로 먹고 싶지 않은 고약한 취향마저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꽃게들을 위해 기도하며 흘렸던 눈물이 속죄의 마음이 아니라, 그 맛있는 것을 못 먹은 것이 억울했던 것은 아닐까 의심할 정도이다.
엄마께 꽃게탕이 먹고 싶다고 하니 집에서 해주시겠단다. 번거롭게 뭘 그러나 싶다가 갑자기 엄마가 해주는 것이 더 먹고 싶어서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움직인다는 것은 싱싱하다는 것이려니 하며 솔로 등을 깨끗이 손질하고, 아직 살아 있는다는 것은 맛있다는 것이니 신나게 아랫 배에 손을 넣어 등에서 살 점을 떼어 냈다. 야만 보다는 포만을 생각하며, 싱싱하네, 맛을 위해 내장을 너무 씻지 말자는 등의 대화만이 화기애애하게 오갔다. “엄마 근데 생각나? 내가 어렸을 때, 아빠가 활게를 되게 많이 사 와서…” “그래 너 가끔 진상인 구석이 있어서 엄마가 얼마나 힘이..” “엄마! 집게 발로 꼬집으면 아픈가” “애가 왜 이래, 저리 치워!” “이히히히히”
“아이고 근데 이 게는 다리 한 개가 없네! 근데 엄마 사람도 손가락이 오른쪽 다 섯, 왼쪽 다 섯 해서 열개인데, 게도 양쪽 다섯 개씩 해서 다리가 열 개네! 왜 그렇지?” “그러게” “사람과 같은 조상인가? 응? 응?” “애가 정신없게, 손 안 다치게 조심해”
사람의 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필요한 만큼, 필요한 모양 대로 존재한다고 믿는 나는, 이 공통점이 우연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게의 다리가 열 개. 분명 무엇인가가 있다. 그러고 보니 ‘게는 왜 옆으로 걷게 되었지? 세상에 옆으로 걷는 생물이 또 있던가?’ 새삼스럽게 한 참을 들여다 보았다. ‘게는 왜 이렇게 맛있지?’ 외에 다른 질문을 하게 된 것을 기특하게 생각하던 찰나. 게가 안아 주겠다는 듯이 다리 열 개를 활짝 벌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부분의 생물이 내장을 담은 앞 부분을 보호하도록 아래에 두거나, 팔이나 다리로 오므려 감싸 안을 수 있는 반면, 게는 내가 저의 배를 떼어 내는 데도 아무런 손을 쓰지 않고, 그저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는 것이다. 인과관계로 보면, 그런 모양새를 하고 있으니 옆으로 가는 수고를 겪게 된 것일 텐데. 그 정도로, 자신의 불편을 불사하고도 누군가를 앉아 주고 싶다는 것일까? 나 생각하기에 바빠서 다른 사람들에게 품을 내어 주는 일이 드문 내가 게와 마주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내가 뭐든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선택하면 되고, 내가 그만큼 하기만 하면 그에 대한 답이 주어지는 단순하고 명확한 세계였다. 그래서 나는 강단이 있었다. 두 볼에 붙은 자고 싶은 유혹을 찰싹찰싹 때려가며 예습 복습을 하기도 했고, 학원을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지 않았다. 이만큼까지, 여기까지를 꼭 지켰다. 국물 한 수저에 눈물까지 흘렸던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 또한 그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른이 되는 일은 꼭 그렇지는 않았다. 내가 선택받아야 하는 일이 더 많았다. 내가 열심히 해도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일들도 생겼다. 보기 중에 없는 답들이 수두룩 했고, 심지어 애매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선을 찾아내고 그에 맞추어 움직여야 되는 일들도 생겼다. 확실하게 모르겠으니 대충 어림잠아 얼버무리면서도 아는 척 괜찮은 척하기도 했다.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보기에 내가 괜찮은 사람일리가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사람은 무한하다고 하는데, 나는 자꾸 유한해져서 사방의 벽에 손이 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아졌으며, 그래서 사람이건 물건이건 간에 남겨두는 만큼 내려놓고 보내야 하는 것들을 분별해야 했다. 그러면서 나는 여기까지구나, 이렇게 생겼구나,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그게 낯설고 당황스러워 목구멍으로 쓴 맛을 꿀꺽 삼키기도 하고, 그래도 넘치면 눈물로 쏟아내기도 했을 터였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가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그래서 나와 나의 기준들로 가득 차 있던 곳에 다른 사람을,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 놓고 감사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일이었다.
분개하는 일이 줄었다. 기준은 여러 곳에 여러 수준으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잘 했다고 칭찬받을 때 하늘을 날지 않는다. 나 혼자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해서 너무 실망하는 일도 줄었다. 때로는 내가 계획하지 못한 멋진 일들이 그냥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급해하는 일도 조금 줄어 든 것 같다. 세상에 버릴 경험은 없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제 활게를 어떻게 요리할 수 있는가, 안 먹겠다던 꽃게탕을 먹은 나는 얼마나 못났나 하는 대신, 목숨 같은 제 배를 활짝 내놓고 안아주려는 듯한 게의 관대한 형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어느 가을 밤 신선한 꽃게를 골라온 남자와 야무지게 탕을 끓여 내던 여자를 생각하면서, 그들의 모든 수고를 통해 만들어지는 맛있는 한 상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이들이 화사한 웃음을 머금고 안아달라고 팔 벌리는 것도 예쁘지만, 어른이 어디 이리와 한번 안아보자 하고 내어주는 품은 보기만 해도 울먹거릴 만큼 따뜻하다.
나와 크기만 맞았다면 꼭 그렇게 했을 터였다. 대신 내 밥 그릇이 넘치도록 게 다리며 등 껍데기를 올려 놓는 어른, 우리 엄마를 안아봤다. 부드러운 게 살 같은 육신의 만남에 달큰한 국물같이 따뜻한 기분, 그리고 큼큼한 내장의 곰삵은 편안함으로 배가 불렀다.
뱀발.
꽃게를 계속 생각하니, 맨날 꽃게탕만 먹고 싶어지는 나의 단순함에 잠깐 슬퍼졌었는데(ㅠ.ㅠ),
다행히 이중섭 또한 떠올랐다(^^).
게가 많이 나오는 그림의 배경은 아마도 제주이지 싶다.
가난해도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던 제주의 시간은
이중섭에게 화양연화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의 그림들 속의 꽃게도 나를 안아줄 것처럼 따뜻하고 푸근해 보인다.
누가 붙여주었는지, 이름 앞에 '꽃'을 붙인 것은 참 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