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가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커피 속의 나를 만나보기라도 했겠소.
커피 빈약하게 한 스푼 반, 프림 인심 좋게 푹 담아 두 스푼, 설탕 보통으로 두 스푼! 나의 비법 레시피이다. 맛의 차이는 ‘빈약하게’과 ‘인심 좋게 푹 담아’의 미묘한 양조절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는 엄마들의 요리 지도 때 나오는 ‘간장 적당히’의 ‘적당히’와 같은 것이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사는 우리 집에는 손님이 많았다. 만남의 초반에 적절히 끼어든 찻상은 늘 환대를 받았다. 얘가 커피를 참 잘 탄다던가, 참하게 잘 가져오는 이 숙녀는 누구냐던가 하는 칭찬이 그냥 하는 인사말인 줄도 모르고, 참 잘 보셨다는 듯이 "맛있게 드세요" 가식을 떨고 물러나곤 했다. 유명 바리스타처럼 굴었지만 커피는 나에게 금기의 음료였다. 어른들의 음료였기 때문이다.
마시지도 못하는 어른들의 음료를 잘 타게 된 이유는 우리 집 어르신들이 식후에 늘 커피를 찾으셨기 때문이다. 정리되고 있는 식탁의 한편에 자리를 잡고, 서걱거리는 검은 알갱이와 아기 냄새나는 프림, 달콤한 설탕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역할이 꽤 만족스러웠다. 팔팔 끓인 물을 붓고 몇 번 저으면 확 퍼지는 냄새, 그렇게 달큰하고 구수하는 것은 어린이의 먹거리 중에 없었다. 혀로 맛보지 못하는 커피를 코로 마음껏 들이키며 음미하는 일은, 손님을 위해 열심히 진미를 만들어 내보내고 정작 본인은 단순한 비빔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쉐프의 이중생활 같은 것이었다. 엄마가 보우하사 이따금 한 모금을 남겨주곤 했는데, '호로록 호로록 호로…' 빈잔과 목구멍 사이에 공기 터널을 만들어 쓸어 담기를 반복하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빨리 어른이 돼서 마음껏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몇 번을 호호 불며 나누어 마시는 어른들의 우아한 손길들을 보면서 커피에 대한 나의 집착이 점점 커져 갔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치른지 며칠 밖에 안되었는데, 갑자기 많은 것이 허락되었다. 대학교 로비에 놓인 자판기 커피는 100원이었다. 아직까지 어떤 차이인지 밝혀내지 못한 밀크커피와 카페오레 중에 고심을 하다가 하나를 선택해서 조심스럽게 꺼내 들고 수업에 들어갔다. 책상에 놓인 종이컵을 보며 '대학생, 이제 어른이다.' 혼자 중얼거렸다. 하지만 웬일인지 커피 보다는 율무차며 코코아를 더 많이 마셨다. 카페에 가도 과일 주스가 더 당겼다. 그간 품어 온 집착이 무색하게, 다른 것들을 만끽하느라 커피에는 무심했다. 그동안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외할아버지도 이사를 가시면서, 우리 집 커피와 프림은 간단한 믹스커피로 대체됐다. 이제 바리스타도 필요 없었다. 이래저래 커피를 찾는 일이 많지 않았다.
‘… 뭔 스?’ “강남역에 있는데 진짜 맛있어” “어~~ 나도 먹어봤지. 라테 진짜 맛있지?” ‘…’ “야 근데 좀 비싸지? 2,500원인가?” “야!!! 뭔 커피가 그렇게 비싸냐!!” 해외에 다녀온 게 고작 일 년인데 그 사이 한국은 조금 변해 있었다. 그렇게 비싼 커피가 있다는 것, 내 친구들이 먹어봤다는 것 때문에 시공의 거리감을 느꼈다. 당시 대학교 학관의 한 끼 식사가 1,900원이었고, 자판기 커피는 여전히 100원이었기 때문이다. 졸업을 얼마 안 남기고 취업에 성공했다. 그런데 직장인들의 식사 후 코스가 바로 스타벅스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커피를 받아 바로 밖으로 나갔다. 점심시간이 정해진 직장인들에게 거대한 유인 자판기 같은 곳인가 보다 생각했다. '시간'을 보내러 카페에 가는 줄 알았는데, 이 곳에서는 '커피' 자체가 목적인 듯했다. 선배들이 어여삐 여기사 얻어 먹는 일이 많았다. 맛은 괜찮았다. 특히 커피에 우유를 넣었는데도 살뜰하게 따뜻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부드러운 우유 거품과 적당한 감칠맛도 좋았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는 너무 호화로운 곳이었다.
일이 손에 익지 않는 것이 조바심이 나서 야근이 많았다. 회사를 다니면서 기말고사도 준비해야 했다. 제법 차가운 겨울 냄새가 섞인 11월 공기를 가르며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데, 갑자기 억울했다. ‘뭐한다고 이렇게 빨리 회사에 다녀서’ 입이 써졌다. 삐뚤어져야 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럴 때다. 주변을 급하게 째려봤다. 어둑한 길에 동그란 녹색 간판, 그 안에 물고기 몸통을 가진 여자가 환하게 나를 불렀다.
이게 내가 처음으로 사 먹은 스타벅스 라테였다. 선배님들의 전갈 없이 주문을 직접 해본 것도 처음이었다. 소개팅에서 주선자가 자리를 뜬 후, 둘만 남아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처럼 어색했지만 대수롭지도 않았다. 시럽도 두 번 꾸욱 눌러 넣고, 괜히 시나몬 가루도 뿌렸다. 카페가 텅 비었는데도 거대 자판기의 용처에 맞게 굳이 밖으로 들고 나와서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운 공기 때문에 더 선명해진 코와 혀가 기미상궁 노릇을 하건대, 향도 좋고 부드러운 것이 과연 수고한 내가 즐길만한 수준이라고 확인해주었다. 내 돈 주고 마신 거라 그런지 목으로 넘어가는 우유 거품도 더 부드럽고 풍미가 좋았다.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있구나. 그래서 이런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거야. 점점 더 멋진 직장인이 되고, 힘들 때는 나한테 상도 주는 거지.’ 왠지 만족스러웠다.
그날 저녁 이후 나에게 수많은 상을 내렸다. 관대한 시상자는 일찍 일어난 출근길에, 오늘 하루 잘 보냈다고, 비가 와도 회사에 나온 게 기특해서, 눈이 오는데 나가 놀지 못하니까 달래는 의미로, 날이 상쾌하면 더욱 파이팅을 외치는 의미로 상을 줬다. 커피 값은 소비의 시대를 꼬집는 주범으로 언급되기 일쑤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호사를 누려도 될까 마음 졸이는 일에 무감해지고, 핑계로 삼았던 상이란 개념도 없어졌다. 급기야 마시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면 애정결핍에 걸린 사람처럼 어쩌지 못하고 무력해했다. 생각과 판단이 배제된 본능과 습관의 영역이었다. 중독. 나는 커피 중독이었다.
중독이 완벽한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한 것은 아메리카노가 좋아진 때이다. 아메리카노로 말할 것 같으면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하도 맛있게 마셔서 따라 사보았다가 쓴 맛을 본 경험이 있다. ‘입에 쓴 것이 몸에 좋다고 하던데 커피는 과연 얼마나 몸에 좋으려고 이럴까?’ 영화에서 블루칼러였던 주인공이 일하기 전에 마시는 걸로 나오더니만 미국 노동자의 새참 소주 같은 거였나?’ 더 마시지도 못하고 아까워서 하루 종일 들고 다니기만 했다. 반전은 몇 년이 흐른 뒤 [노서아 가비 (러시안 커피의 옛말)] 작가와의 만남 자리에 갔을 때다. 홍대의 반지하공간에서 소설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유명 바리스타 분도 초청되어 한편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메뉴가 핸드드립이라고 하길래 ‘아 그 쓴 거, 나는 안 마신다고 할까?’ 했으나 말할 여유도 없이 손에 쥐어졌다. 들고 있는 게 조심스러워 양을 줄여볼까 하는 마음으로 조금 호로록. 짭. 짭. 하는 순간!
나는 아시아 밀림에 있었다. 방금 그 곳의 축축한 흙을 맛본 것이다. (아시아 밀림에 가 본 적은 없다. 물론 흙을 먹는 경우도 없다.) 열대의 낙엽, 새와 들짐승들의 배설물이 켜켜이 쌓이고, 이것이 풍족히 내리는 비와 섞여서 오랜 시간 동안 삭은 흙, 그 어떤 잉태도 가능할 비옥함을 가진 맛이었다. 장대해서 나는 미물이 되는 맛이었다. (와인 맛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분들을 보면서 분명히 와인을 많이 마셔서 취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약간 지린 향과 함께 느껴지는 신 맛 때문에 식욕이 당겼고, 혀에 닿는 고소함으로 산뜻해졌다가, 목구멍 가까이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탄 맛 때문에 살짝 비장해졌다. 이 진액에 뭘 타 먹는 것은 안될 일이었다. 이후 커피 중독은 심해졌다.
비 오는 날은 아메리카노다. 봄과 겨울은 왠지 아메리카노다. 아침은 대략 아메리카노다. 오후 5시쯤에는 단 것에 절대 아메리카노다. 이것은 처음 반 팔을 꺼내 입는 날엔 아이스 라테, 가을에는 카푸치노, 감정의 허기가 질 때는 카페모카, 캠핑에서는 믹스커피, 식빵 찍어 먹을 땐 흰 우유 섞은 믹스커피의 짧은 한 눈 팔이에 비해 거의 절대적인 신뢰, 내 생활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메리카노를 내려다 본다. 오래된 연인을 새삼스럽게, 찬찬히 바라보듯이. 그런데 아메리카노가 보이는 대신 내가 보인다. 호 불면 흩어졌다가 잔잔해지면 다시 나다. 나르시스처럼 커피에 비친 나를 본다. 접시에 코박는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컵이 좁으니 나르시스처럼 빠져 죽을 일은 전혀 없을 테다. 마음 놓고 한동안 멍하게 있어 보기로 한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했겠소.
이상의 [거울] 중 일부인데, '거울' 자리에 '커피'를 넣고 읽어본다.
커피 때문에 나는 커피 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하는 구료 마는 커피가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커피 속의 나를 만나보기라도 했겠소.
'정말 커피를 통해 나를 만나보기라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순간 시간은 나보다 빨리 흐르기 시작했고, 그래서 의식적으로 짬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호호 불어가며 천천히 음미하는 커피의 시간 같은 것 말이다. 커피를 통해서 나는 한 숨을 돌리고, 어리광을 부리며, 모범생 같은 생활에 조금의 삐딱함을 허락하며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를 낳고 몸을 풀면서 약간의 산후우울증을 겪었다던 친구가 “수유한다고 커피도 못 먹는 게 제일 힘들더라. 다 됐고, 그냥 아이스라테 한 잔 사주는 사람이 그렇게 고맙더라구.”했다. 또 어떤 식당 아주머니께서 설거지를 마치고 믹스커피를 타시더니 “일 다 끝내고 이거 하나 먹는 게 낙이지 뭐.” 하셨다. 어른이라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척척해낼 수 있고, 무슨 일이 생겨도 쉽게 괜찮아지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되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벅찬 일들을 해내느라 늘 분주한 그들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중독이 필요하다. 잠시 잊고 이기적으로 나만 볼 수 있는 시간 말이다. 어렸을 때, 우리 집 어르신들이 커피 마시던 자태를 떠올려 본다. 그들은 내가 '달콤하고 시원한, 그러나 녹기 전에 먹어야 하는 아이스크림' 같은 시간을 만끽할 수 있도록, '씁쓸하지만 구수한 커피의 시간'을 묵묵히 음미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라는 책에 리추얼(Ritual)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한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자주 반복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만년필이 많은데 그중 어떤 것을 사용할까 고르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또 침실을 호텔 침구로 꾸며서 사그락 거리는 소리와 촉감을 즐기며 잠드는 일도 이야기했다. 리추얼 또는 조금 거칠게 표현한 중독은 작지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자주 하는 것이 포인트다.
"무한도전 물품은 다 사요. 달력은 기본이고. 그리고 걸그룹 CD 사는 정도. 술 담배를 안 하니까 이 정도는 집에서 뭐라고도 안 해요."
"복권 사. 당첨되면 뭘 할지 생각하는 거. 하고 싶은 게 계속 달라지는 게 신기해. 당첨 안되면 또 사면되고."
"남편이랑 길게 하는 대화? 뭔가 둘이 대화하다 보면 이래서 우리가 결혼할 수밖에 없었지 하는 공통점이 나오거든요. 그때가 좋아요."
"소품, 가끔 무인양품 보면서 사고 싶어 했던 디퓨저를 얼마 전에 샀어요. 꼭 필요한 건 아닌 것 같고, 제 마음속 가격 기준을 넘겼던, 저만을 위한 사치품 같은 거여서 고민 좀 했었는데 이번에 샀어요."
"난 무민 모으잖아. 귀여우니까."
"스카프나 목도리 사는 거? 모든 색깔과 질감이 다 필요한 것 같아^^ 평소에 봐 뒀다가 세일하면 고르고 골라 일 년에 한두 개씩 사는 게 고렇게 좋더라구."
친구들에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 작은 중독'에 대해 물어봤다. 그리고 이내 참 잘 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됐다. 자신들의 중독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뽜사한 기분이 들어서 손수건을 보거나 사는 거 좋아."라고 말한 친구에게는 "손수건 같은 하루를 보내자!" 인사할 수도 있었다. 각자 다른 중독을 갖고 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중독인데, 듣고 있는 나마저도 기분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조금만 더 했으면 '나를 행복하게 하는 작은 중독에 대해 묻는 것'에 중독될 뻔 했다.
자, 그래서 이 긴 커피와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의 결론은 앞으로도 마음껏 마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나에게 짬을 주는 것이므로
입에 쓰더니만 역시 (적어도 정신) 건강에 좋은 거였구나 생각하면서!
뱀발.
간혹 이상하리만큼 나에게 엄격할 때가 있는데, 8년 전 봄도 그랬다. ‘사순절은 고통을 이겨내면서 더 귀한 것에 집중하는 시기로구나. 그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잠시 끊어보면 어떨까?’ 내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제물을 찾다가 제 이야기는 아닌냥 딴청을 부리는 커피를 지목했다. '커피 중독. 그래 나처럼 독립적인 인간이 중독이라니. 본때를 보여주자. 당분간 커피를 안 마시는 거다.’ 바로 금단현상에 시달렸다. 단 게 그렇게 당겼다. 오징어, 멸치 등 씹을 거리도 필요했다. 중독이 틀림없었다. 남들이 마시는 커피 향은 어쩜 그렇게 좋던지! 그러던 중에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동행인 엄마는 믹스커피를 제일 좋아하는 분이다. 카페라테도 밍밍하다고 안 드시고, 카페모카나 시쿤둥하게 드셔주시는 분, 그런 엄마와 마드리드에서 첫 날을 맞았다. 시차 때문인지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을 떨고 있었는데, 이른 아침에 시장기를 달랠만한 곳이 없었다. 그때 작은 카페를 찾아냈다. 신이 나서 가까이 가봤더니 현지 중년 아저씨들이 대부분이었고, 드문드문 담배 연기가 나는 동네 카페였다. 동양인은 우리 둘 뿐이었는데,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가게 주인마저도. 그 무관심이 '넌 이곳의 이방인이구나'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머쓱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들어가, 카페 구석에 놓여 있던 주크박스 만큼 어색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집의 메인 메뉴로 보이는 츄러스와 카페 콘 레체 (cafe con leche, 카페라테의 스페인어 표현) 세트를 주문했다. "난 지금 커피 안 마시니까 핫초코 하나 더 추가할게요." "오~~ 엄마 이 핫초코 장난 아냐. 정말 진하고 맛있어요. 초콜릿을 그냥 녹인 것 같아." "야!! 이 커피 정말 맛있다!!" "응? 이거 카페라테 같은 건데, 맛있어요? 전엔 별로라면서요." "아냐 이건 달라. 정말 맛있다." 핫초코고 뭐고 내가 졌다. 조바심이 났다. 엄마는 맛에 까탈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아무거나 맛있다고 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맛이길래!' 최대의 고비. 정말 어렵게 참아 냈다. 다른 곳에서도 카페 콘 레체를 사드렸지만 마드리드의 허름한 로컬 카페 커피가 최고라고 했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며칠을 더 참고 나니 부활절이 왔고 기쁨과 함께 봉인 해제. 오랜만에 아이스 라테를 마셨다. 기분 탓이었는지 진짜 몸의 반응이었는지, 쿵쾅거리며 힘차게 두근거리던 심장의 운동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렇게 육감적인 움직임은 처음이었다. 그 해를 시작으로 매해 사순 기간인 40일 동안 커피 마시기를 금해오고 있다. 금단도 습관이 되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첫 해만큼 힘들지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마드리드의 커피를 떠올리면 바로 금단의 상태에 빠진다. 맛도 못 본 것에 금단이라니. 나는 마드리드에 꼭 다시 가야 한다. 솔 역(Sol Stn.) 광장 구석에 있는 로컬 카페의 카페 콘 레체를 맛보기 위해서 말이다.
내가 찾는 카페 콘 레체,
인상착의는 이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