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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영 Nov 25. 2015

#03. 돈까스, 위대한 유산

당연한 엄마는 따뜻하고, 당연하지 않은 엄마는 예쁘다.

“시청, 어른 하나, 어린이 2개 주세요.”

계주가 시작되었다. 전철표가 바통이고 매표소 아저씨, 나, 엄마가 선수다. 바통을 든 선수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법, 엄마는 나를 돌볼 겨를 없이 남동생의 손을 잡고 결승지점을 향해 빠르게 계단을 오르내렸다. 분위기는 그다지 따뜻하지 않았다. ‘어디 가는 거지? 근데 엄마 기분이 좀 별로인 거 같지? 알아서 잘 해야겠다.’ 외출에서 돌아온 엄마가 집에 있던 동생과 나를 급히 집어 가다시피 했던 것은 기억나는데, 어쩌다 그런 분위기가 되었는지는 생각이 안 난다. (이럴 때는 꼭 내가 문제의 원인이던데 ㅠ.ㅠ) 왠지 새침한 엄마와 그저 해맑은 동생을 번갈아 보면서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시청역이다. 전철이 천천히 멈출 준비를 하자, 엄마는 다시 출발선에 섰다. 운동화 끈을 동여매는 대신 동생의 손을 꼭 잡으면서.


'털컥 촤아아아'

본격적인 계주 결승전이다. 시청 역사는 밖의 시원한 공기를 맛보기까지 오른쪽으로 돌았다 왼쪽으로 돌고, 작은 계단을 올랐다 또 내려가야 했던, 나에게 미로 같은 곳이었다. 그 길을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람처럼 누비는 엄마, 나는 길 눈 좋은 엄마의 모습에 유독 반응했다.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 줄 개선장군 같은 모습이 어찌나 멋지던지, 연약한 나비 흉내를 내며 어깨에 살포시 기대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진짜 그랬으면 크게 혼났을 것이다. 엄마의 체구는 작다. 그녀의 아담한 어깨에 크게 자란 레트리버만 한 여자 아이가 매달린 모습은 흉했을 것이다.) 드디어 밖으로 나가는 계단이다. 지하보도의 후끈함 때문에 더 상쾌한 초겨울 공기. 그 공기가 내린 동아줄을 잡고 기분 좋게 건져진 곳은 서울 시청 앞이었다. 어둑해진 서울 한 복판은 차들로 꽉 차 있었다. ‘자, 이제 어디를 가시려나?’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엄마는 거기 서서 가뿐 숨을 고를 뿐이었다.


“저기 봐”

‘뭘 보라는 거지? 움직이는 차? 저 멀리 큰 건물? 이런 걸 보자고 여기온 건 아닐 텐데...’ 허둥대는 내 눈동자를 엄마가 불러 세웠다. “저기 트리 보여?” “우아~~!!” 그때 마침 불이 켜진 것인지, 아니면 그제야 내 눈에 들어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과연 그 많은 차들의 전조등 빛을 헤치고 일순간 큰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였다. “매년 시청 앞에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드는데, 오늘이 올해 처음 불을 켜는 날이야.” 지금이야 길이 정비되어 시청 앞 광장을 편하게 다니지만, 그때만 해도 광장은 멈추지 않는 도로였고 가운데 섬이 있었다. ‘트리가 참 예쁘구나’보다 ‘이렇게 차가 많은데 어떻게 저기로 건너가서 나무를 세웠지?’를 더 궁금해하고 있던 차에 “저녁 먹으러 가자”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아니 돈까스”

“진짜 정식 안 먹고 돈까스 먹어?” “응” 나는 단호했다. 일 년에 몇 번이나 먹는다고 그 맛있는 돈까스를 두고 처음 듣는 정식이라니, 안 될 말이었다. “여기 돈까스 하나, 정식 하나 주세요.” 동생은 엄마가 권하는 정식을 흔쾌히 좋다고 했다. ‘아이고, 저렇게 쉽게 넘어가다니. 하기사 호빵 안에 들은 팥을 초콜릿이라고 부르는 아이이니, 이름을 혼동한 거 아닌가 모르겠다. 내 꺼 주나 봐라.’ 마주 앉은 사람을 한층 더 예쁘게 보여주는 노오란 불빛, 식탁에서부터 내려와 내 무릎을 살살 건드리는 하얗고 빳빳한 식탁보, 반가운 포크와 나이프, 그리고 유럽 귀족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앞섶에 끼는 천. 여기는 경양식 집이다! 수프가 나왔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냄새. 거기에 주근깨처럼 후추가 솔솔 뿌려져 있다. 어디서 배웠는지 수저를 몸쪽에서 밖으로 보내며 떠먹기 시작했다. '나를 잃어버려도 상관없다는 걸까' 생각할 정도로 뒤도 안 돌아보고 빨리 걷는 엄마가 조금 섭섭했던 것, 답답했던 지하철 안, 하마터면 돈까스를 못 먹을 뻔했던 아찔했던 순간을 수프로 위로받고 있는데, 하얀 셔츠에 까만 조끼를 입은 분이 식사를 가져왔다.


“바꿔 먹어”

돈까스뿐이 아니었다. 두툼하고 매끈한 고기 덩어리(함박스테이크), 둥그스름하게 눌러 튀긴 감자(아마 해시 포테이토)와 고구마탕 등이 소담스럽게 담긴, 동생 앞에 놓인 것이 정식이란다. “왜 동생 걸 달라고 해? 아까 정식 싫다면서.” “…” “정태야, 누나 이거 줄까?”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동생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으나 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결국 엄마는 솔로몬처럼 함박스테이크도 반으로 가르고, 감자튀김도 반으로 가르고, 다 반으로 나누어 주셨다. 정식은 동생 것이 분명했다. 솔로몬이 ‘아이를 나누어 가져라’ 했을 때 괜찮다고 울면서 손사래를 쳤던 친엄마처럼, 반으로 잘리는 음식 앞에서 나는 안도했고, 동생은 눈물을 보였기 때문이다. 정식이란 메뉴를 알게 된 충격, 동생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심란했던지 유감스럽게도 그 진미에 대한 기억은 미각보다 시각으로 남았다.


미안함은 사소해졌고 고마움은 흐릿했으며 엄마는 당연해졌다. _ 응답하라 1994

“넉넉하지 않아서 해주고 싶은 것도 못해주는데, 그런 거라도 챙겨주고 싶었지.” 그날 왜 그렇게 새침했냐고 물어보려고 꺼낸 이야기 끝에 이런 고백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은 셋인데, 식사는 두 개뿐이었다. 엄마는 돈까스가 싫다고 하셨다. '입맛이 까다로워서 싫은 것이 많은가? 배가 쉬이 안 고픈가?' 그런 의문도 없이, 엄마가 입이 짧은 건 늘 그래 왔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그 해 크리스마스트리의 첫 점등을 보여주려고 정신없이 뛰었던 여자, 우리 엄마의 그 당시 나이가 지금의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들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1987년의 구정, 지금의 나와 동갑인 엄마




“돈까스나 먹을래?”

그날 정식 뺐어 먹은 것도 갚을 겸 동생에게 돈까스를 제안했다. 이제 아마데우스, 장밋빛 인생, 까스등 같은 이름을 가진 경양식 집은 찾기 어렵다. 많은 순간 시청 근처의 그 경양식집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구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 까지는 아닐지라도 매년 겨울 가족들과 함께 그 곳에서 돈까스 정식을 두 개만 시켜서 나누어 먹으며, 그 시절을 맛있게 되새김질했을 텐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근처 일식 돈까스 집으로 갔다. 일식 돈까스는 예전 돈까스에 비해 세련된 여자 같다. 두툼한 고기에 앙고라 털 옷같이 풍성한  튀김옷을 입고, 고소한 향이 일품인 '군침 No.5' 냄새를 마구 풍긴다. 한 입 먹기 좋게 나오므로 억센 칼질도 필요 없이,  뾰족구두굽 같은 긴 젓가락으로 한쪽을 집으면 그 뿐이다. '바삭'  '바삭바삭' 내 귀에만 선명하게 들리는 그녀의 소곤거림 또한 섬세하다.


일본은 불교의 영향으로 1,200년 동안 육식을 금했다. 그래서 근대화와 체력증진을 위해 다시 육식을 권했을 때, 일본인들은 생경해했다. 그들이 쉽게 육식을 접할 수 있도록 개발한 것이 돈까스다. _ 두산 백과 요약


점등식뿐이 아니다. 방학 때는 꼭 영화 한편은 봤다. ET, 애니, 구니스… 방학 동안 곰곰이 곱씹을 만한 좋은 영화들이었다. 어떤 겨울에는 가족 모두 모여서 종이에 크레파스로 별을 그리고 오렸다. 엄마가 팝콘을 실로 엮고 중간중간에 우리들의 별을 함께 바느질하니 멋진 크리스마스 리스가 되었다. 그 해 크리스마스 장식은 창문에 단 그것이 전부였지만, 아침에 눈 뜰 때마다 보이는 고소한 수공예품이 맘에 꼭 들었다. 경복궁 뒤에 있던 옛날 국립중앙박물관이 헐릴 때 조금 섭섭하리 만큼 꽤 자주 다녔었다. 동네에 공사를 하면 동그란 돌을 주어다가 돌멩이 모양 대로 사과도 그리고 얼굴도 그렸다. 이것도 저것도 없을 때는 신기한 것으로 가득 찬 재래시장에 갔다. 생일에는 꼭 따뜻한 축하를 받으며, 또한 축하해주는 법을 배웠다. 매일이 같지 않고 하루하루 특별할 이유를 알려주었다. '넉넉지 않아서 그런 거라도 해주려고 했다'지만 나는 한 번도 모자란 적이 없었다. 엄마가 만들어 주었던 반짝이는 기억들 덕분에 되려 '늘 풍족하게' 지냈다.


그러니 익숙하지 않은 고기를 꽃 같은 튀김옷으로 덮어 먹기 좋게 내었듯이, 동생과 내가 생경한 세상을 예쁘게 볼 수 있도록 빡빡한 생활 속에서도 살뜰히 부지런했던 엄마, 그런 그녀가 그날 선택한 메뉴가 돈까스였다는 것은 참 잘 어울리는 일이다.


'이제 바통 받아'

부모님과 자식들의 관계가 역전되는 시점이 있다. 당연하던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는 때 말이다. 알면서도 피터팬 증후군에 걸린 사람처럼 유독 인정하지 않으려고 뻗댔었다. 인정하는 순간 부모님이 나이 든 것 같이 느껴지는 것도 싫었을 뿐더러 어색하고 불편한 일들을 내가 떠 맡아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오랜기간 당연하게 누려온 나의 시간이란 '부모'란 이름을 가진 어떤 청춘들이 기꺼이 감내한 수고와 비례했다. 그러고 보니 충분해 보였다. 계주선수가 되어 세상이라는 아득한 레인(lane)을 뛰어오는 동안 엄마 손에 꼭 쥐어져 있던 바통은 무엇이었나? 도대체 얼마면 '넉넉하다'고 말할 수있는지 모르겠는 물질적인 것들 대신에 자식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상냥함, 늘 하고 싶은 것이 있는 호기심, 해 내는 꾸준함, 그래도 다 잘 될 꺼라는 용기, 세련된 취향, 엄마는 늘 내편이라는 든든함 같은 것들이었다. (내가 엄마를 이렇게 생각한다고 우리의 시간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엄마와 나는 조금만 오래 붙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투닥거리기 일쑤다.) 엄마가 주려는 바통은 함께 뛰어 온 시간 동안 보아왔던 엄마를 닮아 있었으므로 마음에 쏙 들었다. 어찌나 꼭 잡고 있었던지 건네 받은 바통이 뜨끈했다.


“엄마 파리 간다. 다음 주 수요일에 출발하려고.”

“어, 그래요, 수요일이면, 일주일 후네!” “너무 급한가? 토요일로 할까?” 엄마의 세 번째 홀로 해외여행이다.


국민학교 때 잡지에서 유럽의 크리스마스 마을을 보고 ‘이곳에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김찬삼의 <세계일주 무전여행기>를 읽으며 그 열망은 커져갔다. 그러나 그녀는 반항을 모르는 대한의 착한 딸, 해외 연수에서 돌아오는 길인 딸아이를 만나러 간 것이 첫 해외여행이 되고 말았다. 키워놓은 보람인가? 딸 애가 먼저 여행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간단하지만 유럽 일주도 했고, 스페인도, 미국도... 떠나면 집에 두고 온 것(사람 포함 화초 등)이 궁금해서 향수병에 걸렸다가, 인천 공항에 도착하기만 하면 ‘Domestic(입국)’이 아니라 ‘Transfer(환승)’로 가고 싶은, 알 수 없는 마음을 다스리며, 늘 잠재적인 여행자로 지냈다. 공부시킨 게 누군데 잘난 척하는 딸년 비유 맞추어 가며 통역해달라기 뭣해서 영어 수업을 시작했다. ‘창 가 좌석으로 주세요’ ‘짐 하나 더 맡길 수 있나요?’ ‘여기 계산서 주세요.’ ‘방 있나요?’ 수업에서도 계속 여행을 떠났다. 제 자리 걸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이렇게라도 계속 출국과 입국을 하니 속이 편했다.


바통을 나에게 넘긴 그녀는 이제 자신의 속도대로, 가고 싶은 곳으로 걸어 보고 싶다고 했다. 여행을 시작했고, 영어를 배웠고, 여행 용품이 싸게 나오면 구입도 해두고, 동호회에도 나갔다. 아포가토가 맛있다고 했고, 자신의 취향을 저격하는 예쁜 가방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당연했던 엄마는 참 따뜻했는데, 당연하지 않은 엄마는 정말 예쁘다. 


“너네 잘 지내. 엄마 없으면 너네 둘 뿐이야.”

뭘 또 저렇게 비장한 말을 하나 싶으면서도 그런 마음으로 미지의 공간과 시간을 향해 발을 뻗고 있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동생과 내 손을 꼭 잡고 온 힘으로 달음박질을 치던 엄마. 손에 들린 우리가 무거워서 그랬던지 언제부터인가 조금 버거워하는 엄마가 보였다. 그게 아까워서 자꾸 부추겼는지도 모르겠다. 기억력이 예전만치 않아서, 쉬 피곤 해져서, 눈이 침침해서 못하겠다면서도, 출발하는 그녀는 어느 때보다 싱싱했다.


2015년 짙은 가을, 내가 저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 이렇게 싱싱할 수 있다면!


내 나이의 엄마를 떠올린 것처럼, 지금 엄마 나이의 나는 어떨까 상상해봤다. '세상의 속도가 나를 앞서버려 울고 싶을 수도 있겠구나. 몸보다 마음이 아직도 생생하게 두근거려 두 볼이 보올그레질 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 어느 때 나만의 속도로 차곡차곡 걸을 수 있기를!'하고 기도했다.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씩씩하게 출발하는 엄마를 보며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에게서 받은 것처럼, 나는 언제, 누구에게, 어떤 바통을 만들어 가벼이 넘겨줄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계주를 달리는 나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지면서도 한결 가볍다.


참, 올해 서울 시청 앞 크리스마스트리의 첫 점등날은 11월 28일(오후 5시~6시 반께)이라고 한다.




뱀발.

'파리에 무차별 연쇄 테러가..' 아침부터 뉴스 속보를 통해 아직 상황이 정리되지 않은 테러 소식을 멍하게 보고 있었다. 엄마는 예상대로 담담했다. 자꾸 이러면 더 신경 쓰인다고 엄포도 놓았다가 이동하는 기차에서는 천사 같은 한국 청년이 도와주고 있다며 안심도 시켰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미사 드리고 오는 길에 나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전화기 너머로 '펑'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소스라쳤다. "괜찮아, 뭐가 살짝 터졌나 본데, 아무도 신경 안 써, 파리지엥들의 여느 일요일처럼 아빠들이 아이들 데리고 나와서 산책하고 있어. 걱정 끼치는 건 미안한데, 조심히, 계획했던 대로 있어볼까 해."


"MEME PAS PEUR _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엄마가 알면 싫어하고 미안해하시겠지만) 나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파리의 어수선한 소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모바일 뉴스를 계속 새로고침하며, 화가 났다가 두려웠다가 무기력해진다. 이 와중에 무엇보다 나를 위로하는 것은 파리 시민들의 대응이다.


- "우리는 예전처럼 지하철에 타고, 바에 가고, 친구를 만날 것이다. 테러리스트들은 우리가 겁먹기를 바라겠지만, 일상적인 삶이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귀가했다. 파리에서 12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과 자신들이 운집한 경기장 근처에서 테러가 감행됐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동요하기보다 “용기를 잃지 말라”고 서로를 격려했다.
- '택시기사들은 미터기를 끄고 공포에 쌓인 시민들을 이동시켰습니다.'
- '열린 문'(Open door)이라는 뜻의 'PorteOuverte'라는 해시태그가 개설, ‘거리에서 헤매는 중이라면, 마티르 우리 집에 2~3명이 머물 수 있다’는 식으로 집 근처 도로와 수용 인원을 알렸다.
- 일부 파리 시민들은 헌혈을 위해 3시간 가까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어젯밤에 일어난 참사에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네요. 모두가 함께 슬퍼하고 걱정하는 마음입니다."
- 프랑스 잡지 아스트라(Astrapi)는 어린이들에게 '테러리스트는 일반적인 이슬람 신자와 아무 관련이 없다. 프랑스는 누구나 살 수 있고,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국가이다. 광기와 폭력에 제일 좋은 대응은 일상적으로 생활하라는 것이다.'라고 하는 2페이지 소책자로 설명했다.
- “무력 보복은 더 나쁜 상황을 만들죠. 정부들은 돈과 이익이 없으면 내 일이 아니라고 해요. 진정한 힘과 지혜는 시민들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일상을 찢겨버린 파리 시민들이 자녀들과 세계 사람들에게 남기고 있는 유산은 '미움'이 아니라 '용기'다. 아픔을 숨기거나, 우리를 건드리다니 가만두지 않겠다고 분개하거나, 당신네들은 뭐했냐고 국가를 나무라는 데 힘을 쏟는 대신 '우리는 많이 아프다. 하지만 우리만 아픈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이 이런 비극을 불렀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 함께 이겨내 보자.'고 한다. 왠지 깍쟁이 같아서 정이 가지 않던 프랑스 사람들이 물려받고 또 물려주고자 하는 '자유, 평등, 박애' 덕분에 나는 오늘 힘을 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용기가 세계 곳곳에 나누어져 서로를 아프게 하는 일들이 없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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