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빛 비추는, 언제나
서른넷이 되던 해에, 분가했다. 야근이 많으니, 회사와 가까이 있겠다는 핑계였다. 붙박이가 살뜰하게 들어찬 복층 원룸인 덕에 옷, 책, 이불 그리고 좌식 책상만 들고 쉽게 집을 나왔다. 단출한 살림이었지만 나만의 공간으로써 부족함이 없었다. 걱정이 끊이지 않는 전화 너머 본가에는 '들어왔다, 곧 자려고 한다.'라고 안심을 시키고, 곧바로 2차를 가거나, 밤새도록 와인, 맥주를 홀짝이며 책이나 영화를 보기도 했다. 멱 놓아 부르는 노래 실력은 여전한데 단전에서 올라오는 막춤은 좀 늘었다. 드라마를 보고 낄낄대다가 혼자 웃고 있는 내 꼴 때문에 눈물이 날 때까지 더 웃곤 했다. 며칠 동안 운 적도 있다. 그때는 그것밖에 할 수가 없었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가족과 함께였다면, 걱정하지 않도록 이유를 설명해야 했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을 것이다. 펄떡거리는 울음의 목덜미를 꾹 틀어잡고 이불속에 숨겨두었을 생각을 하니까 내키는 대로 울 수 있는, 이렇듯 끝까지 나답게 있을 수 있는 곳이 있어서 안심이 됐다. 동시에 나만의 공간이란 머리카락이 얼마나 빠지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장, 그걸 또 수챗구멍에서 꺼내는 극기 훈련장, 설거지를 안 하고 두면 여지없는 곰팡이의 등장, 그러니 밥을 차려 먹을 것인지 차라리 굶을 것인지 고민하는 두 자아의 팽팽한 긴장, 모았다가 한 번에 해 말린 빨래를 여기저기 걸어두는 난장이었다. 무엇보다 내 공간과 그 안의 나를 돌볼 수 있게 된 성장의 장이었다고 말하겠다.
복층 원룸 전면은 남향으로 난 통창이었다. 남향 볕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덩그런 원룸을 무대처럼 훤하게 비췄다. 특히 겨울 낮에는 스포트라이트 같은 날씬한 볕 줄기가 집안 깊숙이 들어왔다. 그것이 조용한 공기를 가르며 살곰살곰 돌아다니는 걸 보는 게 좋았다. 어떤 어스름한 저녁이었다. 블라인드를 끝까지 제쳐보니, 보라색, 분홍색, 녹색, 파란색이 엉켜 북국의 오로라처럼 너울거렸다. 그 앞에 퍼질러 앉아서 대충 비빈 밥을 우적 거리며 '칼퇴와 저녁의 여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이번 계약이 만료되면 주인이 집을 내놓는다 하니, 이 집을 사거나 이사를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이사를 가겠다고 했다. 답을 하고 나니, 진짜 '집에, 몹시' 돌아가고 싶었다. 가족이 있는 집으로 퇴근을 하고, 같이 밥을 먹고, 서로 다른 생각과 느낌을 듣고, 서로의 안부를 말이 아니라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졌다. 나만의 공간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없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참지 못하는지, 나를 맞닥뜨려야만 알 수 있는 나의 형태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확실했다. 혼자 사는 방법을 알기 때문에 함께도 잘 살 수 있겠다 싶었다. 남향으로 난 통창은 이미 깜깜해져 영화가 끝난 스크린 같았다. 또 다음 영화를 기다리는 스크린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다시 본가에 들어가면 갑갑할 것이라고 말렸고, 분가했다가 바로 시집갈 줄 알고 마음 놓고 있었던 엄마의 심기도 꽤 불편해 보였지만, 나는 좋았다. 다시 집에 기어들어간 지 1년이 지났고, "따로 살고 싶어!" 고백한 건 내가 아니라 엄마였다. 난 잘 지낸다.
겨울이 지겨울 무렵 쨍하게 맑은 날이다. 밖을 나섰는데 차가운 바람 속에서 단내가 스친다. 이건 겨우내 퍽퍽해진 나뭇가지가 뿌린 향수 냄새, ‘봄내 No.5’이다. 갑자기 무슨 자신감인가 싶어 다가가 살피면 여지없이 작은 봉우리가 올라와 있다. 맑은 물처럼 청아해진 하늘색도 눈에 들어온다. 비로소 봄이 오는 순간이다. 열원보다 광원으로써의 볕이 쌀쌀한 기운을 데우기에는 부족해도 길 위의 풀과 자갈들, 담벼락과 돌 틈 사이, 나뭇가지의 겨드랑이 새를 파고들어 눈이 부시게 비춘다. 어깨가 절로 펴지고 뭐든 할 수 있을 것같이 걸음이 한껏 낙천적이게 된다. 인상주의 화가인 오지호(1905-1982)의 <남향집>은 나로 하여금 다시 따뜻한 한 해가 시작되었음을 깨닫는 순간에 느끼는 기분, 기력을 끌어올린다.
인상주의는 말 그대로 어떤 순간 작가가 가진 느낌, 즉 인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프랑스에서 시작됐다. 화구를 갖고 밖에 나가서 그릴 수 있는 환경이 되자 특히 빛이 가진 다채로운 색채들을 발굴하고 그림에 담았다. 오지호도 빛을, 그중에서도 한국의 빛을 사랑했다. 동경미술대학을 나온 자신의 인상주의가 일본풍인 것을 깨닫고, 스스로 서양의 기법을 공부하여 한국의 풍취가 가진 빛깔들을 찾아내고자 했다. 이를 발전시켜 친구인 김주경과 함께 한국 최초의 컬러 화보집을 발행하는가 하면, 미술 이론을 정립해 후배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줌으로써 한국 인상파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의 대표작이자 문화유산(2012)인 <남향집>에서 누군가는 청색, 노란색, 붉은색, 녹색, 검은색 등 오방색이 보이는 것을 찾아내기도 하는데, 그것을 차치하고라도 겨울과 봄 사이 한국 공기가 가진 특유의 쨍한 맑음이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특별하다. 그늘에도 빛이 있다고 했던 그답게 푸른색, 보라색, 분홍색 등이 섞인 그림자가 초가집 담벼락을 화사하게 만든다. 덕분에 주머니에 손을 꼽은 계집아이에게도, 한 껏 웅크리고 볕을 쬐는 강아지에게도 활기가 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을 나는 이다지도 사랑한다. 그 까닭을 말로 한다면 너무도 평범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집 뒤로는 초록으로 덮인 조그만 동산이 있고, (후략)"
그림 속 집은 오지호가 실제 개성에서 살았던 곳이다. 이곳의 보통학교(현. 초등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해 광복 직전까지 약 9년을 살았다고 한다. 집 앞에서 졸고 있는 개는 그가 기르던 삽살이고,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둘째 딸 오금희이다. 이후 전남 화순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와 남은 평생을 살았다고 하니, 분단 이후에는 가보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기억 속의 남향집이다. 그는 그곳 남향집에서 직장을 다니며 아이들을 키우고, 동시에 자연을 마음껏 그리던 때를 삶에서 가장 즐거운 시절이라고 했다. 동시에 작품이 그려진 1935년이 식민지 시대의 한 복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남향집’은 조국을 빗댄 것일 수도 있다. 지금은 냉기가 가득해도 곧 봄은 올 것이라는 희망을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담아 그려낸 것이다.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오지호에게 <남향집>은 나침반이 가리키는 남향을 너머, 마음이 가리키는 남향의 집이지 않았나 싶다. 그것이 생활이 쌀쌀하게 느껴지는 어떤 날에도 곧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기억나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살던 원룸은 B동 712호, 그래서 B712. 생떽쥐베리 작품에 나오는 어린왕자의 별인 B612과 비슷하는 것을 비밀번호처럼 혼자만 알고 지냈다. 5년 만에 이삿짐이 싹 빠진 집을 쳐다보면서 마지막 인사를 하자니, 어린왕자의 별에 사는 장미 같은, 붉은 꽃이 나에게 화답하는 기분이 들었다. <남향집> 속에 금희의 빨간 원피스가 그 꽃과 닮았다. 어린 왕자가 제 별을 떠나와서도 장미를 잊지 않았듯이, 그리고 결국 장미에게 돌아가듯이 언제든 마음을 돌려 한 숨 쉬고, 힘을 얻는 기억이 담긴 '남향집'이 나에게도, 오지호에게도 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