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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영 Oct 11. 2020

어미들의 크기

가장 친절하고 꽤 치밀하게

미술관에서 도슨트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림보다 내 앞에 서 있는 두 아이에게 자꾸만 눈이 갔다. 초등학교 입학 전후로 보이는 남매가 어찌나 얌전하게 듣던지! 옆에는 그들을 닮은 엄마도 있었는데, 그림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에게서 한 발 떨어져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몸집이 눈에 띄게 작아서였는지 모든 것이 섬세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에게 전하는 말소리마저 조심스러워서 주위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요즘 미술관에서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보통 “OO야, 이건 무슨 그림일까?” “이거 정말 멋지다, 그치? 너도 이렇게 그릴 수 있어?” “OO야, 거기 서 봐 엄마가 사진 찍어줄게.” 같은 말들이 마치 내 귀에 대고 하는 것처럼 크게 들리곤 했다. 그러면 피곤해진 나는 그 OO를 보고 ‘네가 고생이 많구나.’ 속으로 말하곤 했다.


미술관에는 기념촬영을 할 수 있는 큰 보드가 있었다. 마침 그녀가 아이들을 세우고 사진을 찍으려고 하길래, 다가가서 “셋이 찍어드릴까요?”하고 물었다. 그러겠다고 해사하게 웃는 엄마와 수줍게 선 두 아이들이 최대한 잘 나오도록 요모조모 애쓰면서, 몇십 년 전 우리를 떠올렸다. 엄마도 어린 나와 동생을 데리고 미술관에 자주 갔었다. 


그때 나는 엄마한테 흠뻑 빠져있었다. 지금도 쿨내가 진동하는 엄마의 양육방식이 밀땅의 기술로 작용한 것인지,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집착했다. 복잡한 전철역을 활개 치며 목적지에 데려다 놓는 모습이 멋지고, 장사치들과 능숙하게 흥정할 때 매력이 넘쳤다. 심지어 화를 낼 때도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어느 밤 길, 동생은 엄마의 왼손에, 나는 오른손에 매달려 부지런히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문득 캄캄한 길을 당당하게 걷는 엄마를 올려다봤다. 가로등을 조명처럼 받은 늠름한 엄마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말이 침처럼 흘러나왔다. “엄마는 왜 그렇게 커?” “…” 대꾸가 없었다. 한 평생 작은 키를 아쉬워한 엄마다. 한 참 뒤에 그때 왜 답이 없었냐고 물어보니, ‘어이가 없어서 그랬다’고 한다.


내 키가 자랄수록 엄마는 점차 작고 귀여운 아줌마가 되어 갔다. 어느새 엄마의 키를 넘기고, 되려 내가 챙겨드려야 할 부분이 많아지고 있었을 때였다. 둘이 충남에 있는 한 절에 놀러 갔다. 엄마가 샛길을 둘러보겠다며 길을 벗어났다. 엄마는 늘 이렇듯 모험적이니, 나도 툴툴거리면서 따랐다. 스님들의 거처로 보이는 곳을 지날 때, 갑자기 거친 개 짖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어어어 어’ 엄마의 목소리가 그 위에 얹혔다. 앞서 걷던 엄마가 다급히 뒤돌아 나를 밀쳐 대는 바람에 개를 보지 못했지만, 그놈이 성이 난 것은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나를 구석에 밀쳐 넣고, 내 등을 감싸 안았다. 개 짖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사납고 큰 개인 것이 확실했다.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개는 사람을 물 수 있다.' '개한테 물리면 공수병에 걸릴 수 있다.' '엄마는 날 보호한다.' '나도 엄마를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티미하게 굴고 있는데, 결국 ‘아!!!! 악!!’하는 엄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만큼 크게 '도와주세요!'하고 허공에 소리칠 뿐이었다. 잠시 후, 느릿느릿 스님 한 분이 나타났다. 동아줄 부여잡듯 더 크게 '도와주세요!' 했는데도 스님은 아랑곳없이 천천히 나를 지나쳐 뒤로 가서는 개에게 “에잇, 그러지 마”하는 거였다. 우리의 절박함과 대비되는 대처였지만, 어이없어할 사이도 없었다. 엄마가 괜찮은지 얼핏 살피고, 이 놈의 개를 찾았다. ‘얼마나 큰 놈일까?’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스님 앞에서 얌전한 척 시치미를 떼고 서 있는 건 자그마한 하얀 똥개였다. 당장 두 손으로 짚어 올려 세게 흔들기만 해도 저 스스로 기절해버릴 것 같이 연약해 보였다. 저만한 것이 어쩌면 그렇게 크게 짖으며 달려들었나 했더니, 새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예민해진 것이라고 했다. 혹시나 새끼를 해 할까 봐 달려든 '어미 개'와 내가 물릴까 봐 막아선 '우리 엄마'를 보면서, 세상에 모든 어미들은 몸집의 크기와 상관없이 새끼를 생각하는 마음 집이 크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큰다 해도, 끝내 엄마보다 더 클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어미소> 장욱진, 1973, 17.4x 25.5cm,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내가 아는 가장 행복한 그림을 꼽으라고 하면 장욱진(1917-1990)의 <어미소>다. 여느 소와 다를 것 없던 암소는 그녀의 젖 께 매달린 핏덩이 송아지로 인해 특별해진다. 그림 속 송아지가 뒷 편의 집들보다도 대충 그려진 것 같지만, 손가락 하나만 들어서 그걸 가려보면 알 수 있다. 송아지가 없으면, 큰 소의 성별도 알 수 없게 되고, 전체적으로 밋밋한 그림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즉, 송아지가 이 그림이 가진 행복의 원천임이 확실해진다. 어미소는 표정도 없고, 선 몇 개로만 그려져 있는데도 경쾌한 율동감을 지니고 있다. 어미소의 행복이 둥글둥글한 보디 라인을 따라, 황금빛 몸뚱이와 논두렁을 타고 화사하게 퍼진다. 그래서 그림 속 어미소는, 논밭보다도, 저 너머 집들보다도 크다.


장욱진은 평생 작은 것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그 어떤 공부보다 그림에 열중했다. 대지주의 아들로서는 걱정스러운 행보였을 것이다. 화가들을 환쟁이로 부르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일본인 역사교사에게 반항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고 서양화가 공진형의 화실을 다니며 그림을 이어나갔다. 20세에 다시 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고 늦은 나이에 동경제국 미술학교 (지금의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서구 미술을 배우러 간 그였으나 소재는 늘 한국적이었다. 1940년대 초반의 일본은 제국주의, 전체주의가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늘 힘없고 작은 나라였던 조선의 소녀, 놀이, 장독, 까치 같은 것을 그렸다. 또 짙은 서양 유화 물감을 다시 닦아 내어 동양화 같이 그렸다. 해방 후,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대학교에서 안정된 자리를 받았지만 오래 하지 못했다. 대신 화가로서의 작고 심플한 생활을 선택했다. 홀로 덕소에 가서 자연과 더불어 12년 동안 그림만 그렸다. 도시화로 그곳이 붐비게 되자 명륜동 집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피해 또 수안보로 그리고 용인으로 옮겨 다녔다. 세상이 그를 큰 곳으로 나오라고 잡아당겨도, 그는 작은 것을 고집했다. 이리저리 아무리 움직여도 결국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 같았다. 그런 그의 작품은 크기도 작다.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이 대작을 중심으로 하는 데 비해 그의 720여 점 작품은 대부분이 소품이다. 그런데 작은 그림 속의 모든 것들이 명확하고 크게 보인다. 실제로 장욱진은 “작은 그림은 친절하고 치밀하다”라고 말했다.


실제 몸집의 크기야 어떻든 모든 어미들은 크다. 그런데 ‘얼마나 크냐’고 물으면 제대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표현이 모자라 아쉽거나, 아니면 너무 화려해서 오그라든다. 이 와중에 장욱진의 <어미소>를 보니, 한참 우물거리다 적확한 단어를 찾은 것처럼 속이 시원하다. 작은 것을 추구한 큰 예술가가 그린 어미소의 크기, 이보다 더 ‘친절하고 치밀하게’ 우리 어미들의 크기를 가늠하게 해주는 것이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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