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여행 이틀 전
엄마와 딸이 함께 한 유럽 감성 여행
무작정, 무계획으로, 몸이 받쳐주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다녀 볼 거라고, 엉뚱한 짓만 하며 태평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오늘에서야 몇 가지 여행 물품을 사기 위해 떠밀리듯 쇼핑몰에 나갔다.
장을 보고 나오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 서점 여행 가이드 코너 앞에 다다른 나는 넘쳐 나는 여행 안내서들을 보는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그 먼 나라에 가려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종류도 다양하게 가판대를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가이드북들...
나는 마치 시험공부 안 하고 판판이 놀다가 시험일을 코 앞에 둔 학생처럼 갑자기 주눅이 들고 사색이 되어, 일단 그중 하나를 펼쳐 읽어 보려 했는데.. 도무지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고, 시험공부를 안 해도 너무 안 했다는 자책만이 나를 괴롭힌다. '시험을 잘 볼 수 있을까?' '아니, 내가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까?'
일단 슬쩍 커닝이라도 해야 하겠기에 두 권의 책을 사서 서둘러 서점을 나왔다.
짐을 꾸리려다 보니, 대체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건지 머릿속이 하얗다. 다른 건 잘 모르겠는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챙겨 넣어야 할 영양제와 약만 두 보따리라는 거다. 나이 들면 여행 짐 싸다 지친다더니 내가 딱 그 모양. 20여 년 전 유럽 배낭여행 계획을 세울 때의 그 팔팔하고, 마냥 신나고, 뜨거운 열정으로 출렁이던 나는, 이제 없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나. 지금의 나이다.
인생은 긴 여행이다. 내가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인생이라는 여행은 나의 생각대로만 움직여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나는 내가 계획하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고, 또한 인생의 모든 좋은 일들은 뜻 밖에 다가왔기에 더 좋았다. 준비된 인생이 없듯, 준비된 여행도 없다는 나의 처음 생각이 너무 순진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난, 지치지 말고 지금의 나를 믿기로 한다.
교과서로 공부하진 않았지만, 삶의 내공으로 풀 수 있는 문제도 있을 거라고.
인생의 가이드 북 없이 여기까지 왔듯이, 여행 가이드 북 없이도 잘 다녀올 수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