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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 young Dec 04. 2015

33. 절망, 희망, 절망… 그리고 희망

엄마와 딸이 함께 한 유럽 감성 여행

모든 것이 너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은 곧 다가 올 재난의 신호일 수 있다.

빠듯한 일정이라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모든 것이 매우 순조롭게 흘러가고, 가 보려고  마음먹은 곳들을 큰 무리 없이 다  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대로 여행이 끝나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찰나였다. 하지만, 이 세상에 사람이 하는 일 중에 완벽이란 없다.

영국에서의 마지막 날, 일은 버킹엄 궁전 앞에서 벌어졌다.


버킹엄 근위병 교대식을 대체 왜 간 걸까?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다는 수문장 교대식 같은 행사에 대체 누가 갈까 관심 따위 없었는데, 그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이 행사에 굳이 가 보려 한 게 후회스러웠다. ”여왕의 나라”인 영국에 왔으니, 궁전 근처에서 벌어진다는 세계적인 퍼레이드를 한 번쯤 가봐야겠다 싶었던 내가 미웠다. 세계 각지에서 밀려온 엄청 난 인파 속을 헤매다가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화면은 박살이 나버리고 만 것.

절망.


서울에서는 휴대폰을 가까이 휴대하지 않는 나여서 핀잔도 많이 듣곤 했지만, 막상 먼 타지에 나오고 보니 믿을 만한 건 손 안에  들어오는 휴대폰뿐이었다. 간신히 익힌 구글맵 저장 기술을 십분 활용 해, 계획했던 행선지를 따라 버스며 지하철 정류장들을 미리 찾아 저장 해 두고 런던을 다 가진 듯 자신 만만했었는데. 사진첩을 꾸미겠다고 찍은 사진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무엇보다 내 머릿속 메모리 칩에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는 거의 한 개도 없었다. 심지어 딸의 전화번호도 기억에 없다는 게 기가 막혔다.

난 졸지에 궁전 앞에서 불행한 고아가 돼버린 기분으로 한동안 멍청히 서있었다.


다음 순간, 한국 사람을 찾아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외국에서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우리나라 핸드폰이 아닌가! 어딘가에 서비스센터가 있을 것이고, 거기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그 와중에 해낸 건 그나마 기특한 일이다.

외국에 나와 수많은 인파 속에서 한국 사람, 특히 한국 여성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동양 여자들 중에 제일 예쁜 여자를 찾으면 된다 (한국 남자들은 정말로 이걸 알아야 한다!). 살결도 곱고, 행색도 깔끔하다. 한마디로 눈에 딱 띈다. 다행히 바로 근처에서 분명히 한국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들과 커플을 발견했다.

스마트폰 (최신 무기 LTE를 탑재했다!)을 이용해서 서비스 센터의 위치를 찾고, 거기까지 가는 교통편을 알아내서, 자신의 교통지도에 친절하게 표시를 해 주는 젊은이가 어찌나 고맙던지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며칠 만에 듣는 한국말로 진심 걱정해 주며 행운을 빌어 주는 데 얼마나 든든하던지. ‘그래, 역시 내 나라 사람들이 최고야!’.

절망은 순식간에 희망으로 바뀌었다.


서비스 센터를 찾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지만, 여행을 즐겨야 할 시간에 난데없이 웬 고생인가 싶은 생각에 속이 상했다. 하지만 최대한 냉정하고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마음속으로 나만의 주문을 외우며 당도한 서비스 센터. 결과는 희망적이지 않았다.

서비스 센터 주인은 수 차례 엔지니어 룸을  들락날락하며 될 듯 말 듯 애를 태우더니, 내가 지닌 내수용과 그곳의 수출용 모델의 액정이 달라서, 결국 고칠 수 없다는 게 결론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수용에는 있는 DMB 시청 용 안테나가 현지 핸드폰에는 없었다. 나머지 여행을 고려해 볼 때, 그나마 저렴한 ‘언락폰 (unlock phone)’이라는 걸 구입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새 폰에  익숙해지는 건 아마도 집에 돌아갈  때쯤일 거라는 생각에 좌절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희망이 다시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나마 깨어진 암흑의 액정화면을 더듬어 사진과 전화번호 일부를 살려내 준 센터의 노력이 고마울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 불운했던 하루를 돌이켜 보면서 난 결국 절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절망의 과정에서 나를 희망 쪽으로 건져 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버킹엄 궁전 앞에서 만난 한국의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난감한 내 재난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친절하고 차분하게 시간을 내 준 서비스 센터의 주인, 나 때문에 오랜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불평 한 마디 없던 센터의 고객들.

일을 저지른 뒤 하루 종일 밥도 굶고, 기운이 빠져 터덜터덜 찾은 하이드 파크에서 우연히 만난 프랑스 젊은이들은 나의 절망을 또 얼마나 유쾌하게 달래 주었는지, 그리고 맛있는 저녁을 준비 해 놓고  밤늦게 까지 나의 귀가를 기다려준 민박집주인과 그의 친구들까지.

이 세상에 희망의 끈으로 이어 진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은 소중한 하루였다. 나의 절망이 절망으로 그치지 않도록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어져 결국 희망으로 마무리된 하루이다.


살다 보면, 잘 풀릴 때도 있고, 잘 안 풀릴 때도 있고, 좋은 일이 있기도 하고 나쁜 일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엔 다 괜찮은 것이다. 다 망쳤다고 생각한 하루였지만, 지나고 보니 좋은 하루였던 것이다.

어쩌면 힘든 일에 닥치는 순간에서야 우리는 나 아닌 타인의 존재와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니. 우리에게 찾아오는 어려움과 고난은 주위를 돌아보라는 뜻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궁전 앞 ”빅토리아 여왕 기념비” 주변으로 근위병 교대식을 보려는 수많은 관람객들이 모여있다. 나의 사진 촬영은 결국 여기까지...

 "그린파크 (Green Park)". 이름 그대로 드넓은 공원 전체가 온통 ‘그린’이다. 이곳을 가로지르면 바로 버킹엄 궁전이고, 한편으론 하이드 파크로 이어진다. 현지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구입한 새 휴대폰이 등장한 시점.

런던 중심부는 거대한 공원들로 가득하다. 남은 하루를 여기 앉아서 그냥 하늘만 바라보고 싶기도 하다.

저기, 버킹엄 궁전이 보인다. 나의 기억 속엔 사건 사고의 현장으로 남게 될 곳.

하이드 파크 (Hyde Park). 종일 굶고 터덜터덜 걷다가 다다른 곳. 유쾌한 프랑스 청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이드 파크 안 쪽에 이렇게 큰 호수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지도를 확인해 보니 하이드 파크를  가로지르는 ”서펜틴 호수(Serpentine  Lake)”이다. 멋진 하늘과 호수를  바라보며 마시는 얼그레이 티 한 잔. 모든 것이 감사해지는 순간.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둘러본 "런던 타워 (London Tower)" (위)와 "런던 브리지 (London Bridge)". 어린 시절 뜻도 모르고 따라 부르던 노래가 생각나 흥얼거려 본다. ‘London bridge is (NOT) falling down, falling down, falling 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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