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 young Dec 11. 2015

34. 영국 남자, 영국 사람들

엄마와 딸이 함께 한 유럽 감성 여행

영국 여행을 마치면서 영국 사람들, 특히 영국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짧은 방문으로 영국 사람들의 실체를 알기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신사의 나라”라는 키워드와 함께 영국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한 가지 단서를 더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그들의 ‘유머감각’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영국 사람들은 유머를 매우 즐기는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의 유머는 그저 말의 유희가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로 뿌리 박혀 있는 듯하다.


영국으로 향하는 메가 버스가 2시간 가까이 연착을 하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불만 대신 우스개 소리를  주고받으며 답답한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한 술 더 떠서, 돌아오는 버스를 태울 기차가 5시간을 연착하게 되는 상황에서도 이들은 여지없이 유머감각을 발휘했다.

사실, 나는 런던에 올 때처럼 버스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버스가 기차에 실려 해저 터널을 건너게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순간부터 뭔가 공포스러운 기분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여의도에서 마포를 잇는 지하철이 강 속을 관통한다는 사실에 무덤덤해 지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나이다. 도버 해협을 한강과 비교해보니 머릿속이 새까매진다. 그런데 거기다가 5시간 연착이라는 안내 방송은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조차 아무런  불평불만을 하지 않았다. 불평불만은커녕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프랑스를 거쳐서 가야 할듯하니 프랑스행 터미널로 가자”는 기사의 농담에 모두 웃음꽃을 피우며 대 찬성을 하는데, 처음에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정말 프랑스로 가는 건가 싶어 머릿속에서 잠시 벌이 윙윙거렸다.

워낙 지체가 되다 보니 스낵 코너를 다녀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고  하나둘씩 자리를 비우게 되었는데, 버스로  돌아오라고 한  시간보다 늦게 서야 이동 중인 버스 뒤를 따라 뛰어 오는 한 승객을 향해 모두가  박수갈채와 환호를 보내는  모습까지 (서울이었으면 욕을 바가지로 먹지 않았을까?)... 난 이들의 유머 감각에 익숙하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스낵 코너에서 요기를 하면서, 기차를 기다리던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에게 정말 궁금해서 물었었다. “이 상황에서 왜 아무도 불평이나 항의를 하지 않느냐?”라고. 돌아온 대답은, “그럼 어떻게? 방법이 없으니 기다려야지.”였다. 너무나 당연한 대답을 듣고 보니, 나도 별 수 없이 성질 급하고 감정이 앞서는 한국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한 영국 남자로부터 알게 된 바로는, 대부분의 영국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웃는 것을 좋아하고 이것은 보통 유머감각으로 이어지는데, 때때로 유머가 매우 드라이하기도 하지만, 징징대는 쪽 보다는 웃는 쪽을 택하는 풍조가 있는 건 확실하다는 것이다. 덧붙여, 영국 남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을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는 설명이었다. 왜 그런 건지는 자신도 확실히 모르겠단다.


이제, 나에게 영국 남자를 대표했던 이 사람 얘기를 해야겠다. 그가 보여 준 따뜻함과 뭔지 모를 호감 때문에 서울로  돌아온 뒤로도 가끔 메일을  주고받게 된, 내가 묵었던 민박집의 주인 매트이다.

매트의 집 2층엔, 그의 프랑스 친구인 앤과 그녀의 약혼자가 살고 있는 큰 방과 민박용으로 꾸민 작은 방, 넓은 거실에 부엌과 욕실이 딸려 있다. 3층은 본인이 사용하는 공간으로, 음악 작업을 하는 스튜디오를 겸하고 있다.

앤은 2층의 집안 살림을 하면서 민박하는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는 역할까지  도맡아 하고 있는  듯했다. 자신의 개인 헤어드라이어부터 냉장고의  먹을거리까지 내어주며 불편 없이 지낼 수 있도록 마음을 써 주었다. 마지막 날엔 나를 위해 특별히 프랑스 음식을 만들어 주겠다고 해서 와인을 곁들인 파티를 계획하게 되었다.


파란만장한 하루를 보내느라 기진맥진해진 상태로 와인을 사 들고 도착해 보니, 맛있는 음식에 촛불까지 밝혀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 마치 길을 잃고 헤매다 따뜻하고 포근한 집에  돌아온 것처럼 울컥하고 감동이  밀려온다. 나는 무용담을 늘어놓듯 신이 나서 하루 일과를 보고하고, 재미있게 내 얘기를 들어주고 또 맞장구를 쳐 주는 이 사람들이 마치  오랜 친구들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이드 파크에서 만난 프랑스 청년들 얘기엔 앤이 나보다 더 신나 하며 즐거워했다.

그렇게 먹고 마시고, 즐거운 농담이 오고 가며 화기애애한 시간이 흐르고, 쾌활한 앤의 주도로 흥겨운 댄스타임까지  이어졌는데.. 그렇게 분위기는 무르익고, 앤과  약혼자 두 사람의  애정 표현은 점점  뜨거워지고... 약혼한 사이에, 그것도 자유분방한 프랑스인들에게 뭐가 대수이겠는가 마는, 나와 매트는 그만 ‘화기 애매’ 한 상태가 돼버리고 말았다.

이 끈적끈적한 공기를 가로지르는 이상야릇한 감정의 교차. 마주치지 않는 듯 마주치는 눈 빛.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이것은... 그러니까... 일종의... '썸을 탄다'는 것일까..?


버스기사는 능청스럽게 프랑스 쪽 터미널로 정말 기수를 돌릴 태세로 운전 묘기까지 부린다. 지칠 만도 한데, 이렇게 여유가 있는 기사도, 서로 돕고 대화하며 끝까지 재미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영국 사람들도 나에겐 신기하게 느껴진다.

많은 버스와 차들이 터미널에서 하염없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5시간을 기다려 마침내 우리의 버스도 기차에 실리기 시작한다.

버스를 태운 기차 안의 모습. 되도록이면 이 기차가 달리고 있는 곳의 모습은 상상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 해저 터널 공사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를 먹었을지 그 모든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매트는 떠나는 나를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밀크티를 만들고, 갓 구운 토스트에 마말레이드 잼을 발라 ‘잉글리시 블랙퍼스트’를 만들어 주었다.

생각해 보니, 남자에게서 이런 작은 호사 조차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33. 절망, 희망, 절망… 그리고 희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