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여행에 대한 예의

엄마와 딸이 함께 한 유럽 감성 여행

by So young

네덜란드 시간 아침 6시. 위트레흐트(Utrecht) 딸의 숙소에서 잠이 깼다. 현실감이 없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채 지난 24시간의 행적을 떠올려 본다. 긴 비행 끝에 분명 스키폴 공항에서 딸과 상봉을 하고, 공항 대합실에서 과분하게도 딸의 환영 피아노 연주까지 들었다. 이루마의 "Maybe"였다.

스키폴 공항에서 위트레흐트로 가는 기차가 캔슬되는 바람에 밤 12시가 넘어 가까스로 막차를 탔고, 역에서는 환승 버스가 끊겨 택시를 탔다. 택시비는 한국보다 많이 비쌌지만,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내리는 수고를 덜 수 있어서 그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3층에 있는 딸의 방까지 가파른 계단으로 간신히 짐을 끌어올린 뒤, 그대로 기절.

주섬주섬 정신을 차리고 그제야 딸의 숙소를 대충 둘러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더 열악한 환경이다.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룸메이트와 나누어 쓰고 있는 좁은 공간. 침대는 가라앉고 있는 중이고, 물이 새는 화장실, 함께 쓰는 샤워실에 간신히 달려있는 샤워 해드, 어수선한 공동 부엌에 그나마 막혀서 잘 내려가지 않는 배수구…

딸이 지난 2년 동안 머문 곳. 이 낯선 타지에 홀로 날아와 생활의 터를 잡고 공부를 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딸의 선전이 한없이 대견하면서도, 좀 더 번듯한 환경에서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난 또 잠시 먹먹했다.

한창 꾸미고 바르고 멋 부리는 청춘을 반납하고 딸이 이 곳에서 찾으려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찾았을까? 아니, 분명 그 과정에 있는 걸까? 그 과정을 믿고 사랑하고 있을까?


두 달이라는 여정만 정하고 무작정 날아온 나.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머릿속은 더 하얗고 두 달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우선 나의 익숙한 공간을 잊고 낯 선 공간을 기꺼이 마주하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할 듯하다. 그 낯섦을 택해 여행을 온 것인데 이렇게 심난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나이를 먹어서 일까? 이건 여행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잘 챙겨 온다고 챙겼는데 (사실, 잘 챙긴 건 약 두 보따리뿐이다), 중요한 화장품이 보이질 않는다. 재생 크림, 썬 크림, 그리고 나만의 파운데이션.

'난 왜 바보같이 중요한 걸 잊어버린 걸까?' 심한 자책에 기운이 빠지고, 더불어 여행에 대한 자신감마저 떨어진다. 사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런 일로 벌써 자신감을 상실하다니, 소소한 사고도 하나 없이 여행을 마치고 싶다는 바람이 마음 깊이 있었던 모양이다. 언감생심.


진정한 여행을 생각하는 순간부터 익숙한 일상과 습관들은 잊어야 한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닥쳐도 화내거나 약해지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여행에 대한 예의이다.


공항 안에서 바로 한 층 아래로 내려가면 네덜란드는 물론, 유럽 어디로든 통하는 기차역을 만날 수 있다
?딸의 환영식, 이루마의 "Maybe" - 이 순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미 예정 되어 있었으리라.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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