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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어예 Feb 04. 2023

월간미술 Monitor's Letter 모음

2020년 

월간 미술4

수선화가 피길 기다리며

‘미래의 강제소환, 미술의 과제’를 마음 아프게 읽었다.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의 산물인 전시가 기약 없이 미뤄져 버렸다는 것이 가장 큰 아픔, 오프라인 전시를 대체할 수 있는 방안이 아직까지는 한정적이라는 것이 두 번째, 그 대체할 수 있는 한정적인 방안 조차도 대부분의 미술관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라는 것이 세 번째이다. 그 와중에 코로나 이전 세상에서는 보지 못했던 작가와 미술 플랫폼들의 시도들이 사회적 거리를 두는 일상의 소소한 활력이 되었다. 미국의 작가 루이스 로울러(Louise Lawler)가 인터넷에 무료로 올린 컬러링 PDF 파일을 다운받아 색칠하는 호사를 누렸다. 어큐트 아트(Acute Art)가 카우스(Kaws)와 함께 런칭한 증강현실(AR) 어플을 다운 받아 집에서 카우스와 함께 다양한 사진을 찍는 것 역시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우리의 삶을 덮어버린 커다란 불안함 앞에서 베란다에 나와 서로 화음을 맞추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본다. 음악이 현재의 시름을 달래주는 힘을 갖고 있다면 미술은 분명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힐링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지금은 비록 힘들지만 분명 미술계에도 새로운 봄은 올 것이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들이 봄을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최근의 아이패드 작품처럼 미술계에도 노란 수선화가 꽃을 피우며 봄이 왔음을 알리는 때를 기다려 본다. 



월간 미술5

미술이란 무엇인가?

월간미술을 받으면 제일 먼저 특집 기사를 읽어본다. 이번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이라는 제목을 보고 뭔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 한때 많이 회자 되었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의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라는 칼럼 제목처럼 이번 특집기사는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나에게 되묻는 질문 같았다. 미술이란 보기에 흐뭇하고, 이쁘고, 아름답고 소위 인스타 감성에 어울리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느껴오던 내가 부끄러웠다. 내친김에 사전에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찾아보니 ‘공간과 시각의 미를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되어 있다. 미술의 전제는 공간과 시각이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바로 이 시간을 기반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 바탕이란 말이다. 책에 실린 광주 오월미술 특집기사는 비록 미술 비전공자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적지 않았으나, 작품들은 다른 매체 못지 않게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며 그 시대를 생생히 증언해주었다. 또한 그 시대의 아픔에 대한 묘한 토닥거림이 되어 주었다. 문득 전대미문의 이 시기를 견디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분명 이 시점에도 작가들은 작품에 몰입중이리라. 현 시대적 공간을 어떠한 시각으로 보고 어떻게 표현하고, 또 무슨 위로의 말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물론 아직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작가들이 기록한 이 시대는 어떻게 남아있는지 언젠가 특집 기사로 다루어 주길 바란다.


월간 미술6

집에 머물며 집을 기다리다.

월간미술 6월호는 마치 종합선물세트 같았다. ‘21세기에 부활한 허드슨 리버 스쿨의 풍경화’의 월드리포트부터 ‘우리와 당신들’, 그리고 특집 기사인 ‘집으로 가자’까지 이번 호는 어느 하나 재미없는 것 없이 몰입해서 읽었다. 일주일에 하루일지라도 아이들이 등교를 시작해서 여유 있게 읽었기 때문일까, 혹은 이제 코로나 사태가 거의 마무리 되어 이번 호에서 언급된 미술관들을 둘러볼수 있겠다는 기대 때문일까. 지도에서 ‘집으로 가자’의 미술관 위치를 하나하나 찾아가며 동선을 그리고 함께 가볼 맛집도 검색하며 흐뭇하였다. 코로나로 인해 집의 시대가 도래하여 #stayathome이 이슈로 떠오르는 이때 나의 집을 벗어나 다른 이의 집을 방문할 생각을 하는 것이 조금 아이러니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고보면 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을 방문한다는 뜻은 아닐터이다. 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고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인생의 어떤 지점이 중첩되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예술가의 인생이 담긴 집이 미술관, 대안공간, 작업실이 되어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이 얼마나 멋진일인가. 지도에서 검색해 놓은 미술관을 하나도 채 방문하지 못하고 코로나 재확산 우려가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Together At Home의 끈을 놓지 않으련다. ‘집으로 가자’의 연장선상으로 현존하고 있는 예술가의 집 시리즈도 기대해본다.  


월간 미술7

불한당의 습격

월간미술 7월호 ‘불한당들의 세계사 – 텍스트와 예술’라는 제목을 보고 마이클 스코긴스(Michael Scoggins)의 그림 같은 것을 모아 놓은 건가? 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그 화가의 그림을 보고도 적지 않게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흰 캔버스 대신 연습장, 작품을 가득 채운 삐뚤삐뚤한 텍스트. 이건 추상화도 아니고 뭐지? 그러다 작품을 계속 보니 뭐 선으로 채워도 점으로 채워도 심지어 아무것도 채우지 않아도 예술인데, 텍스트로 채웠다고 의아할 건 없지 라는 생각이 들었고 친근감이 들며 소장욕 마저 들었다. (나는 아직도 마이클 스코긴스의 작품을 소장하고 싶어 기웃거리고 있다.) 기본적으로 그와 비슷한 그림을 기대하며 불한당들의 세계사 기사에 다다랐을 때, 나는 정말 말 그대로 텍스트에 매몰되었다. 나는 김영글 작가의 말의 앞부분에 공감했다. “침묵이, 혹은 말없는 이미지의 단호한 존재감이 말의 파편의 총합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이미지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이 미술아니던가? 그 안의 텍스트가 시각 이미지보다 소외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말이다. 문학도 아니고. 왠지 모르게 올라오는 불쾌감을 참으며 꾸역꾸역 그 수많은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다 임영주 작가의 글에 이르러서는 텍스트가 상상이 되고 영화처럼 그 장면이 스쳐지기도 하였다. 문득 코로나 이전 하이메 아욘의 전시회에서 매끈하고 잘 빠진 그의 디자인 작품보다 전시실마다 스쳐 지나가는 텍스트에 더 눈길이 가서 전시장 처음으로 돌아와 텍스트만 다시 읽어봤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그 전시에서 나에게 더 상상력을 불러 일으킨 건 바로 텍스트였다. 이렇게 또 나의 생각의 틀을 또 하나 내려놓는다. 아무렴 어떤가. 영감을 주면 다 예술이지.   


월간 미술8

사에키 유조, 추억 소환

이번호를 덮으며 나는 오래된 나의 소장 만화책을 1권부터 다시 꺼내들었다. 그 만화책의 이름은 갤러리 페이크. 갤러리 페이크는 위조 전문 갤러리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는 일본 만화로 32권가지 나와있다. 갤러리 페이크 11권의 제목은 얼굴 없는 자화상, 내용 중간에 사에키 유조의 얼굴 없는 자화상이라는 그림이 잠깐 등장한다. 비록 흑백이고 만화 느낌으로 수정된 그림이었지만 무언가 강렬한 느낌이었고 ‘파리에서 활동 중 결핵에 정신 이상이 겹쳐 사망’이라는 설명에 나도 모르게 이끌려 사에키 유조라는 화가를 검색해 보았지만 그 당시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지는 못하였다. 파리, 정신병, 요절이라니 고흐의 환생인가 생각했더랬다. 이번 월간미술 ‘서경식 교수의 일본근대미술 순례’에서 사에키 유조의 글을 읽으니 왠지 서경식 교수님이 사에키 유조를 알고 있는 편집자를 만나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나도 왠지 같은 추억을 공유한 듯 하여 기분이 좋아졌다. 사에키 유조를 다시 검색해 보니 그새 많은 정보들이 늘어나있다. 사람 생각하는 것은 다 비슷하구나. 사에키 유조에게는 일본의 고흐라는 별명이 붙여져 있었다. 지구가 어항이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의 지리한 비에 제습기를 하루 종일 돌리며 배 깔고 누워 갤러리 페이크 1권부터 읽고있자니 내가 이 만화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기억, 그때의 상황, 관련된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사에키 유조는 일본의 고흐라는 별명 이외에 추억을 소환하는 화가라는 별명이 붙어도 좋을 듯 싶다. 


월간 미술9

낭만에 대하여

코로나로 인해 글로벌리즘이 시들해가며 로컬리티의 의미가 스물 올라오는 이때 ‘로컬에서 찾다.’ 는 각 지역이 어떤 미래를 지향해야 하는지 시의적절한 질문을 던져주었다. 많은 대규모 전시가 취소가 된 이때 요코하마 트리엔날레2020 기사는 마치 직접 보는 듯 생생했다. 보고 싶던 국립 중앙 박물관의 ‘새 보물 납시었네’에 대한 기사도 반가웠다. 직접 갈 수는 없지만 온라인에서 전시 해설 방송도 한다고 하니 기다리고 있다. 아직도 집 책장 한켠에 초록색 빛 바랜 표지로 자리잡아 있는 성문영문법의 저자가 대단한 컬렉터였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되었다. 이미 유명하지만 간송 스토리는 너무 슬쩍 넘어간 듯하여 아쉬웠다. 무엇보다도 월간미술 9월 호는 낭만의 그 날카로운 이면을 들여다 보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번 호에서 무엇보다 낭만적이었던 기사는 ‘불가피한 현재를 넘기 위해’와 Editor’s View 였다.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인 김사부는 ‘스스로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마라,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낭만도 끝이 나는거다.’라고 말한바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할지도 모르는 민감한 성폭력이라는 주제를 그 주제 당사자들이 예술 공동체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나 있지만), 그 부조리와 폭력을 담담하게 읆조리는 이렇게 낭만적인 잡지라니. 폭력을 자행한 그들이 왜 사는지, 왜 예술을 하는지 제발 한번 더 생각해 보길 바라며, 나 또한 왜 살아가고 있는지 질문을 던져 보아야겠다. 



월간 미술10

즐거움 그 자체, 아르 브뤼

용인에 위치한 벗이미술관은 우리 가족에겐 특별한 장소이다. 집에서 아주 멀지 않은 위치에 있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흥미진진한 놀이터가 있었고 다른 미술관에 비해 아이들이 관람하기 자유로웠으며, 무엇보다도 걸려 있는 그림들을 아이들이 참 좋아했다. 이번 월간 미술 기사를 통해 벗이미술관이 용인정신병원 산하라는 것, 그리고 아시아 최초 아르 브뤼 미술관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기사를 읽고 나니 아이들이 그곳의 그림들을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이브 아트와 유사하나 아트 브뤼과 미술계 진입을 의도하지 않는다는 말이 헤이워드 갤러리 관장의 인터뷰 말 ”숲을 걷는 즐거움 중 하나는 그것을 분석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구경하는 것을 즐기는 거야! 라는 말과 오버랩되어 즐기는 자의 순수성을 이길수 없겠구나, 그런 사람들에게 주류와 비주류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코로나라는 단어가 가장 큰 화두이지만, 하늘은 아름답고 바람 솔솔 부는 그림 보기에 좋은 계절이어 그런지 그 어느때 보다 읽을 거리, 볼거리가 많은 10월호였다. 늘 사진도 글도 재미있게 보고 있는 ‘현대사진에 관한 새로운 시각’ 연재가 당분간 쉰다는 소식에 아쉬웠다. 이런 시국에도 열린 베를린 비엔날레 뉴스와 점점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미국과 영국의 미술관 소식들을 읽으니 나도 미술관 나들이 생각이 간절하다. 얼마 안남은 제니퍼 스타인캠프의 전시를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월간 미술11

호랑이의 뒤끝

동물과의 공존협상이라니. 동물의 살을 탐닉하진 않지만 딱히 반려동물을 탐탁치않게 생각하던 나로서는 ‘모두를 위한 미술관’ 기사를 접하고 벙찐 느낌이었다. 하지만 바로 아 왜 이런 전시가 이제서야 나왔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음료수 금지’, ‘반려견 출입 금지’라는 안내문을 당연시하고 살았던가. 얼마전 TV에서 백호들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어릴때 암컷 사자들로부터 놀림을 당했던 수컷 사자가 몸집이 커진 후 그 암컷들에게 차례로 복수를 하는 리얼 다큐였다. 팀랩 전시에서 동물이 울부짖는데도 흩어지는 꽃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더 미디어를 만지는 상황은 언젠가 우리에게 복수로 다가올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치 지금의 상황처럼. 동물 및 환경적 문제에 대해 이동시(이야기와 동물과 시), 콜드플레이처럼 지속가능한 행동을 고민하는 예술가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또한 이런 억압자 인간과 희생양 동물이라는 구태의연한 프레임을 새롭게 자본주의를 매개로 재정의한 전의령 교수님의 칼럼도 흥미롭게 읽었다. 

새로운 2021년을 얼마남겨두지 않은 이때, 새로 기획 및 모집되는 미술 관련 교육 소식도 담아주시기를 바란다.  



월간 미술2

의도한 우연의 산물, 우주

김환기 우주 미디어아트를 보고 돌아오던 오후 우체통에 월간미술 2월호가 꽂혀 있던 것은 우연일까? 인연일까? ‘우주와 예술; 그너머’라는 제목을 보고 동시성의 우연에 대해 생각했다. 우주를 탄생시킨 빅뱅 역시 우연의 산물인 것처럼(이제까지 알려지기로), 우주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그 모든 것이 우연에 기대고 있는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우리 몸을 이루는 물질이나 별을 이루는 물질이나 90% 이상이 같은 것이라는데 내가 우주고 우주가 곧 나라는, 우주의 의도가 나의 의도이고, 우리의 우연이 우주의 우연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이 수많은 그 우연에,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주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걸까. 한나 아렌트가 어두운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어떤 광명을 기대할 권리를 가진다고, 그 광명이란 이론이나 개념보다는 소수의 사람이 가진 불확실하고 흔들리는 작은 빛에서 비롯한다고 쓴 것처럼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자꾸 불확실성이 큰 우주에서, 그리고 예술에서 광명을 기대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천문예술이든, 사운드 아트든 간에 모든 예술이 계속되어야 할 이유.

내가 1년동안 월간미술의 Monitor’s Letter에 참여하게 된 우연에 감사하며 부디 2021년에 계획된 전시들이 밀리지 않고 개최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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