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독수공방 제출용
신화의 근원지, 그리스, 그곳의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신은 아폴론이라는 기사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아폴론은 대표적인 이성의 신이다. 이성의 최고 덕목은 중용인데 아폴론의 신전만 보아도 세상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델포이에 위치하고 있다. 또 아폴론 신전에 써있는 ‘아무것도 지나치지 않게.’ 역시 중용의 가치를 일깨우는 말이다. 그 이후 부터일까. 나는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그리스를, 그리고 그리스인들을 이성으로 가득 찬 무리로 나 혼자 규정짓게 되었다.
‘죽으면 말썽이 없지. 산다는 것은 ... 두목,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게 바로 삶이오!'’
책을 멈추고 앞 표지로 넘겼다. 제목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리스인 조르바라고? 그리스인이라고? 내가 아는 그리스인이 아니잖아. 니가 아는? 니가 생각하는이겠지. 그리스인 중에도 이런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이 아닐까? 혹시 결말에 다다르면 조르바가 그리스인이 아닌 출생의 비밀이 있을지도 몰라. 사실은 이탈리아 출신이 아닐까? 혼자 몇 번의 자문자답을 한 후에 책장을 다음 페이지로 넘길 수 있었다. 말썽거리를 만드는 것이 삶이라니. 정말이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만큼 옳은 말이 어디있겠는가. 하지만 이건 이성을 중요시하는 그리스인(나의 오랜 믿음)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이다! 삶을 말썽으로 규정하면 눈뜨고 눈을 감고 잠이 드는 순간까지 말썽이 아닌 것이 없고, 그 말썽을 수습하다가 인생이 가는 것인데 그런 인생에서 조르바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거지?
그에 대한 답은 약 200페이지의 책장을 더 넘기며 내 손안에서 계속 펄떡이는 물고기 같은 조르바와 서서히 동화되어 갈 때 즈음 구하게 되었다.
'자기 자신안에 행복의 근원을 갖지 않은 자에게 화 있을진저! 남을 즐겁게 하려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조르바는 그 안의 어린아이를 진정 사랑하는 자였다! 누구나 자기 안에 어린아이를 담고 산다. 그 어린아이는 우리가 제일 잘 아는 존재이나, 동시에 제일 무관심한 존재이기도 하다. 타인의 시선을 좇으며, 세상의 기준을 따르며 우리 안의 아이가 하는 말을 무시해 버리기 일쑤다. 조르바 역시 내면에 베이비 조르바가 있는데 단지 우리와 다른 점은 그 베이비조르바가 나이 든 조르바에게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말썽으로 보이는 것은 그에게 사실 말썽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말썽인 것은 굳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수습할 일도 없을 터이다. 자신 안의 어린아이의 욕구를 인정하고 충실하게 잘 지내는 그는 진정 삶 그 자체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반 정도 읽은 후 나보다 먼저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을 읽은 엄마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엄마, 그리스인 조르바 완전 그리스인 안 같지 않아?”
“응? 완전 그리스인 같은데? 완전 에피쿠로스적이쟎아?”
둘이 갑자기 머엉. 생각해보니 엄마나 나나 둘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겪이었던거다. 게다가 둘다 아폴론과 에피쿠로스 전문가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조르바가 춤추는 모습과 몽테뉴 수상록에 나오는 구절이 겹친다.
“나는 춤을 출 때 춤만 춘다. 잠을 잘 때 잠만 잔다. 아름다운 과수원길을 홀로 거닐다가 잠시라도 딴 생각을 하게 되면 곧 생각을 바로 잡아 그 과수원에서의 산책으로 고독의 감미로움으로, 그리고 나에게로 돌려 놓는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하는 행위들은 우리에게 쾌락을 주도록 어머니 같은 자연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연은 이성뿐 아니라 욕망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므로 자연의 법칙을 어기는 것은 옳지 않다.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무처럼 자연 법칙에 충실히 살고 있는 조르바가 부럽다. 미래를 계획하지도 않고, 걱정하지도 않고, 과거를 후회하지도 않으며, 말썽이 오면 말썽을 겪고 그 자리에서 그 시간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는. 그리하여 이 세상을 떠날 때 후회가 없는. 조르바는 두목에게 철이 들때가 되지 않았냐는 말도 남긴다. 철이 든다는 것. 말 그대로 계절이 지나가는 때를 아는 것, 즉 자연 법칙을 아는 것. 나는 대체 언제 철부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영부영하다가 내 이리될 줄 알았다와 같은 묘비명을 남기게 될까 두렵다. 하지만 그 두려움 또한 미래를 사는 것이구나.
마지막으로, 니체가 '예술적인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 것 처럼 아폴론적인 두목과 디오니소스적인 조르바의 정반합을 통해 성장을 도모한 것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의도가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도 또한 중용을 중요시 여기는 그리스인의 습성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의 나의 의견을 다시 한번 우겨본다. 그리고 나는 내가 현재에 집중하는 방법을 갑자기 찾기는 어려운 일. 나의 아폴론적인 삶에 끼워 넣을만한 디오니소스적인 삶의 요소들을 찾으러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