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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쌤 Mar 18. 2022

우리에게는 흉터가 있다

가끔은 철학자가 됩니다(7)

면도를 할때면, 혹은 화장을 할때면 우린 어김없이 얼굴에 나 있는 흉터를본다.

얼굴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흉터하나쯤 있기 마련이다.

어디서 얻었는지 모를 흉터도 있고, 십분이상 이야기를 해야 설명이 가능한 흉터도 있다. 


흉터는 사고에 의해 일어난다.

사고의 정의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어나지 말았어야할 일'이다.

흉터로 인해 알 수 있다. 그러한 일들이 당신에게 있었다는 것을.

억울한 사고일 수도 있고,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기적같은 일로 그만큼의 흉터가 생겼을 수도 있다. 


몸에 생긴 흉터도 마찬가지지만 마음의 흉터 또한 존재한다.

우리가 겪어 본적 없는 60~80년대의 서울이 우리의 부모님들의 마음에 너무나 많은 상처를 줬고, 그로인해 우리 역시 상처를 대물림 받았다.

사회와 가정이 병들어있다면, 상처가 아물지 않았거나 흉터나 딱쟁이가 생기기전에 계속 곪아터지고 있다는 증거다.

뿐만 아니라 사랑이 과거형으로 바뀌기도하고, 믿음이 못미더움이 되기도 한다.

상처는 내부와 외부 모두에 생기고, 완벽하게 치유되는 경우보다 흉터로 남을 때가 많다. 


완전한 치유와 회복을 원하는 이들이 있다.

사람들은 죽음을 이기려고,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럴수록 상처는 벌어지고, 곪기 마련이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죽음이라는 흉터를 치유하거나 없앨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대물림받은 흉터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어쩌겠는가. 우리는 흉터를 가지고 태어났고, 자생할 수 없으며,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흉터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처의 기억을 사랑하면서 살 수 없다.


우리는 두 가지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흉터를 감추면서 사는 것, 다른 하나는 흉터가 바로 '나 자신'이라고 인정하는 것.

흉터는 내 과거이고, 내 아팠던 흔적이기에 지금의 '나 자신'이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부끄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진다.

흉터 역시 '나'의 일부임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 흉터를 내 가족이기도 하고, 내 친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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