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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May 12. 2017

결혼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기울기를 평평하게 만드는 법

사실 결혼한 여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결혼휴식 여행을 떠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일단 두 개의 산을 넘어야 한다. 바로 자녀와 남편이라는 산을.


아직 10대 이하인 어린 자녀가 있다면 솔직히 불가능에 가깝다. 누가 아이들을 챙길 것인가. 물론 남편이 흔쾌히 도맡아준다면 가장 좋다. 이런 남편을 가졌다면 당신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 당신의 행운을 최대한 누려라. 그러나 대부분의 평범한 여자들은 좀 기다려야 한다. 현실적으로 아이들이 스무 살이 된 후가 적당하다. 그 이전이라면 차라리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을 권한다. 아이와의 여행은 그 자체로 장점이 많다. 또한 앞으로의 결혼휴식 여행을 연습하는 기회도 된다.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느긋하게 즐기자. 시간은 우리 편이다.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대상은 바로 남편. 아이가 컸다고 해도 남편이 걸린다. 당신이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서 망설여진다. 또는 남들이 당신을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할 것 같다. 시간이 가면 해결되는 '아이'라는 산보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남편'이라는 산이 더 높을 수 있다. 내가 아들과의 세계여행을 떠날 때도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그럼 남편은?"이었다. 어떻게 남편을 혼자 두고 갈 수가 있냐는 것이었다. 상황이 안 되면 둘만 갈 수도 있는 거지, 꼭 다 같이 가야만 하는 건가? 완벽을 기다리다 아무것도 못할 바에야 차선이라도 선택하는 게 낫다. 


한편 남편이 적극적으로 반대를 할 수도 있다. 남편이 허락하지 않으면 포기할 것인가.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남편이 허락 혹은 동의하지 않는 일은 평생 시도하지 않을 것인가. 내가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고 너무나 절실한데도 말이다. 결혼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결혼한 여자는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과 거의 모든 관계를 돌본다, 정작 자기 자신은 제외하고서. 결혼생활이 길어질수록 자기 자신과는 더 멀어진다. 엄마, 아내, 주부라는 역할 속에서 그림자 같은 사람이 되고 만다. 한국에서 결혼한 여자란 남편을 중심에 두고 도는 위성 같은 존재가 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크고 작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 사회가 그렇다. 그리고 남편은 이 운동장의 수혜자다.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은 굳이 불편을 감수하려 들지 않는다. 대부분의 남편은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제는 당신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라"고 궁둥이 두드려 주지 않는다. 


여자의 결혼휴식 여행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잠시 벗어났다가, 돌아왔을 때는 그 기울기를 조금 더 평평하게 만들어 주는 일이다.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남편들이 별로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이다. 그들도 낯선 일이기에 거부하고 겁을 먹는다. 이때 당신은 그저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 결국 남편을 설득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포기하지만 않으면 된다. 남편의 반응을 이해하지만 내 뜻을 꺾을 수는 없다고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밀고 나가라. 앞에서 말했듯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다. 이제는 당신 자신을 돌볼 때가 되었다. 조금 더 이기적이어도 괜찮다. 



2011년, 마흔넷 나이에 열여섯 살 아들과 6개월간의 세계여행을 감행했다. 다들 남편이 여행을 적극 지지한 줄 알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행을 준비하는 3년 내내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자가 결국 여행을 감행하자 나중에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나는 온갖 여행 준비와 경비 마련까지 혼자서 해내었다.


6개월의 장기여행은 우리 모자뿐 아니라 남편도 변하게 만들었다. 남편 역시 처음 경험해 보는 혼자만의 생활이었다. 막상 혼자 지내보니 생각보다 살만 했던 게다. 남편은 외로움을 달랜다고 주말마다 전국의 산을 찾아다녔다. 결과적으로 총각시절로 돌아가 아내의 잔소리 없이 주말을 즐길 수 있었다. 평소 집안일에 손 하나 안 대던 남편이 그때는 열심히 청소를 하더라. 왜냐면 아무도 대신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나는 그동안 남편이 집안일을 원래 할 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다. 진실은 이랬다. 버티고 있으면 결국 아내가 하니까, 즉 할 필요가 없어서 안 한 거였다. 남편의 6개월 간의 독립생활은 예방주사처럼 이후의 여행에도 면역을 주었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한결 수월한 법이다. 


지나고 보니 이것이 본격적인 결혼휴식 여행을 하기 위한 준비가 되었다. 어쩌면 절반의 결혼휴식 여행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아내와 며느리 역할에서 완전히 벗어난 시간이었으니. 엄마로서의 자리는 그대로였지만 집에서처럼 아이를 돌보기만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이는 엄연히 여행 파트너로서 6개월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앞으로의 여행에 든든한 바탕이 되어 주었다. 처음부터 결혼휴식 여행을 시작하기 어렵다면 이처럼 아이와의 여행부터 시작해 보라. 아이가 중학생 이상 자랐다면 서로 좋은 파트너 관계가 될 수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집에서와 같은 일방적인 관계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최대한 아이에게 여행을 준비하고 진행할 독립성을 보장해 주는 게 좋다. 평소처럼 잔소리하고 통제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엄마로서보다는 파트너로서 동등하게 여행하기를 권한다. 양쪽 다 독립연습을 해볼 수 있다. 그것이 여행을 통해서 아이도 자라고 엄마도 자라는 비법이다.


2014년 아들이 대학을 갔다. 해외로 갔기 때문에 아들로서는 독립이나 다름없었다. 드디어 육아의 끝이었다. 그해 여름, 아들은 첫 학기를 시작했고, 가을에 나는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결혼휴식 여행이었다. 이후 필리핀 바기오로, 베트남 호이안으로, 프랑스, 독일, 스페인으로 이어졌다. 때에 따라 1주일에서 열흘 간의 홀로여행이기도 했고, 유럽에서는 석 달 동안 한 도시에서 한 달씩 살아보기도 했다. 


일단 장기여행을 경험해(보내) 본 남편은 이후 여행에 매우 관대해졌다. 이제는 어디를 가던 적극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더불어 본인 역시 열심히 여행을 다닌다. 직장인이라 기간은 짧지만 횟수는 잦다. 각자 서로의 여행을 인정해 준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평평해지면 남편이 손해를 볼 거 같지만, 천만의 말씀. 아내가 행복하면 남편도 행복해지는 것이므로. 어느 한쪽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평화' 말고 둘 다 행복한 '변화'가 낫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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