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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May 04. 2017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일년에 한 번은 결혼휴식달 여행을 떠나라!

"세상에,  22년이라니!"



지난 4월, 22주년 결혼기념일을 맞았다.

해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참 오래도 같이 살았다. 스물여덟에 결혼해 어느새 오십이 되었다. 내가 아직 30대였을 때만 해도 결혼 20년이 넘으면 아주 할머니가 되는 줄 알았다. 숫자 계산을 못 할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지만 심정상 그랬다. 결혼한 이듬해 낳은 아들이 벌써 스물두 살이다. 머리카락이 일찍부터 세기 시작해 염색을 안 하면 반백이지만 할머니 되려면 아직 멀었다.


마흔까지 '여행'을 모르고 살았다.

7개월 된 아들이 꼬물거리며 기어 다니던 스물아홉 살 여름, 처음 한비야의 여행기를 읽었다. 이렇게 전혀 새로운 방식(여행)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니! 나에겐 뒤통수를 내리치는 충격이었다. 당시만 해도 일반인의 배낭여행이란 것 자체가 희귀했다. 다들 학교 다니다 적당히 직장에 들어가 괜찮은 사람 만나 결혼하고 애 낳고, 그렇게 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여행이라니, 것도 배낭여행이라니!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7개월 된 아기가 있었고 결혼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여행이 다 뭔가 싶게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렇게 아이 키우며 10년을 넘게 전업주부로 살았다. 어쩌면 내게 원래 여행 유전자가 있었는데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다시 깨어난 게 딱 마흔이었다. 그걸 깨운 건 목까지 차오르는 답답함이었다. 그저 같이 살고 싶어 결혼이란 걸 하고 보니, 무거운 의무만 잔뜩 지게 되더라. 남편도 물론 힘들었겠지만 가부장적 결혼제도의 절대적인 약자는 바로 아내이자 며느리였던, 나였다. 남편과 시댁에 대한 의무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고, 내 능력으로는 결코 만족시켜줄 수도 없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그 말이 딱 맞았다. 사는 게 재미없었다. 그 와중에 아들만이 위로가 되었다. 조숙하고 속이 깊은 아들. 죽으란 법은 없다더니 하늘은 내게 궁합이 맞는 자식을 보내 주었다.



그 와중에 여행은 탈출구였다. 마흔부터 아들과 여행을 시작했다. 첫 여행은 태국이었다. 자신감이 충전된 우리는 다음 해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3개국을 여행했다. 이윽고 3년 뒤에는 세계여행을 하기에 이르렀다. 6개월 간의 세계여행 후 느닷없이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어쩌다 어른'이라더니, 나는 '어쩌다 암환자'가 되었다.

 

여행자에서 암환자로의 변신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로 인해 남편도 많이 달라졌고 나는 며느리로서의 의무를 집어던질 수 있었다. 소위 '나쁜 년'이 된 게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고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부연설명하고 싶다.


"착한 여자는 기껏해야, 천국에 가고

나쁜 여자는 원한다면 그곳이 지옥일지라도, 어디든 간다."


그동안 간절히 그 '나쁜 여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인생을 억지로 사느니 차라리 '나쁜 년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랬다. 드디어 소원을 이루었다! 


착실히 치료를 받고 항암 후 빠졌던 머리카락도 다시 자랐을 때, 여행기 초고를 마무리했다. 2014년 1월, 고대했던 첫 여행 에세이 <고등학교 대신 지구별 여행>을 출간했다. 그 사이사이 물론 여행은 계속되었다. 아이도 자라 열아홉이 되었고 대학에 갔다. 외국 대학이라 더 이상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은 어려워졌다. 아이는 쿵짝이 잘 맞는 여행 파트너였지만 이제는 서로 독립할 시기가 된 것이다.  


아이가 대학생이 된 그해, 2014년도부터 나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했다.

그 여행은 특별하다. 긴 결혼생활 끝에 아내, 엄마, 며느리의 자리를 내려놓고 하는 온전히 나만을 위한 여행이다. 보통 일 년에 한 번 간다. 때로는 몇 주간이기도 했고 때로는 한 달 혹은 두 달이기도 했다. 나는 그 여행에 이름을 붙였다.


'결혼휴식 여행' 


기왕이면 결혼안식년을 가진다면 더 좋겠지만, 실제로 1년씩 자신만의 여행을 할 수 있는 여자가, 이 한국에서, 얼마나 되겠나. 그래도 한 달 정도라면 꿈꿔볼 만하지 않은가. 한 달이 어렵다면 단 1주일이라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서 제안한다.


"여자여, 

오직 나만을 위한 

결혼휴식 여행을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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