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9일>
일요일 아점, 남편이 만든 채소볶음덮밥.
이번 주부터 주말 하루는 남편이 집안일을 하기로 했다.
2011년, 햇수로 6년 전 유방암 수술을 받은 뒤로, 오른쪽 팔로는 무거운 걸 들지 못한다. 그는 장모님께 약속을 했다.
"이제부터는 힘든 집안일 제가 다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남편은 소위 집안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적극적으로 가사노동을 하는 모범적인 남편으로 변신을 한 것이다. 결혼 17년 만의 대변화였다. 이런 걸 두고 남들은 '개과천선'이라고들 하더라. 그러나 개과천선에도 유통기한이 있었다. 대변신은 3년 만에 끝이 났다.
3년 후 그는 허리 통증에 시달리면서부터 착한 남편이고 뭐고 다 때려치웠다. 허리가 아프다는데 무슨 집안일이냐, 우리의 관심은 온통 허리를 치료하는데 쏠렸다. 척추치료를 잘 한다는 병원을 찾아다니고, 유명하다는 한의원에서 비싼 한약도 지어먹고, 베개도 바꾸고, 운동도 하고... 그러나 병원은 다녀봐야 별 소용이 없었고, 허리 힘을 길러주는 코어운동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 결국 남편이 정착한 방법은 스스로 매일 하는 허리운동이었다. 노력 끝에 완전히 낫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일상에 문제는 없다.
그렇게 다시 3년이 지나고 보니, 남편은 원래 스타일로 되돌아가 있었다. 이걸 이르는 말이 있다, '원상복귀'라고. 장모님과의 약속은 진즉에 물 건너갔다. 현관문 앞에 놓인 쓰레기봉투나 재활용 쓰레기를 투명인간 보듯 하고, 입은 옷은 집안 아무 데나 처박혀 있고, 한번 연 옷장이나 서랍은 절대 닫지 않으며, 반찬이 3첩이네 5첩이네 타박하는 그 모습으로 도. 루. 묵 인. 생.
그리고 다시 찾은 안락한 그 자리를 스스로 내놓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관성의 법칙'이다. 원래 권력을 가진 자가 자기 스스로 그걸 내려놓지는 못하는 법이라지. 몇 달 내내 우리는 지켜보지 않았는가, 이 나라 최고 권력의 추한 꼴을. 거기에 비교하긴 좀 뭣하다만, 뭐 말인즉슨 그렇다는 거다.
사실 이 문제와는 별개의 사건이 있었다. 순수하게 여행만 다니던 내가 새로운 일을 벌였다. 작년 가을부터 여행 강좌를 시작했고, 나름 바빠졌다. 유방암 환자이면서도 전혀 환자 같지 않게 해마다 여행을 다녔고 새 일까지 벌이고 보니 몸이 힘들었나 보다. 5년 전 여행지에서 얻었던 방광염이 다시 재발을 했는데 열흘이 지나도 낫지를 않는다. 의사는 무조건 푹 쉬라지만 벌여놓은 일은 있고, 하다못해 청소 한번 해줄 사람이 없는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하여 나는 '설득과 선언' 양면작전을 펴기로 했다. 이보시오, 남편님아. 장모님과의 약속은 어언 다 잊었는가. 어느새 되돌아간 당신 모습을 보시오. 이젠 나도 일을 하니 바쁘고 힘이 드오. 평소에 쓰레기 버리는 일만큼은 당신이 하시오. 그리고 주말 하루는 당신이 집안일을 책임지오. 그것도 싫다 하면 나도 주중 가사노동 파업이오!
그리 힘든 제안도 아니다. 단 두 가지만 하라는 것. 쓰레기 버리기와 주말 하루(이틀 내내도 아니고) 집안일. 그게 뭐 대수라고. 그런데도 남편의 얼굴은 과히 밝지 않았다. 솔직히 이 정도는 요즘 세상에 알아서 해야 할 일 아니더냐. 늙어서 구박받지 않으려면 슬슬 기어야 할 때도 되었건만. 결혼 22년째인데 아직도 가사노동 분담 타령이라니. 참 사람 변하기가 이리 어렵다. 어쨌거나 대화 끝에 그렇게 하는 걸로 결론을 냈다. 남편으로서도 딱히 반대할 명분이 없었던 게다.
어제 토요일 아침 싱크대에서 그릇들을 철벅거리는 남편을 보았다. 설거지를 하는 줄 알고 이게 웬일이냐며 폭풍 칭찬을 하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 그는 그냥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으려는 거였다. 그때서야 떠오른 생각, '아차, 주말에 남편이 집안일하기로 했지!' 며칠 새 그걸 까먹었다. 나부터가 문제다, 이리 허술하니 요러고 살지. 근데 이 사람 봐라, 모른 척 칭찬을 즐기고 있더라. 그러면서 식기세척기를 돌려놓고 나가서 한밤중에야 돌아온다. 이러면 약속 위반 아니오?!
게다가 이 식기세척기로 말하자면 사연이 있다. 이 집으로 이사하고 나서 그는 설치를 반대했다. 이유는 이랬다. 둘이 사는데 뭔 설거지가 힘들다고 굳이 좁은 싱크대에 식기세척기를 설치하냐는 거였다. 나는 그때 그랬다. 그럼 그 쉬운 설거지, 당신이 할 거냐? 대답은 당근 노우. 그래서 설치한 거다. 그러더니 이걸 낼름 사용한단 말이지.
오늘 일요일 아침. 어제 일이 미안했는지 주스 한잔을 만들어 온다. 그러더니 도로 들어가 잔다. 그걸로 아침밥 끝??? 평소에는 꼭 밥을 먹어야 식사라더니, 어째 이리 간단하오?? 짐짓 아침밥 안 주냐고 재촉을 했다. 헐, 주스를 마셨더니 배가 안 고프단다. 아 그놈의 위장은 누가 밥하느냐에 따라 고프고 안 고프고 가 정해지는구나. 아내가 해줄 때는 시간 맞춰 배고프고 내가 해야 하면 저절로 불러지는, 참으로 신기한 위장로구나.
점심때가 다가오니 못 참겠는지 볶음밥을 하겠단다. 나야 무엇이든 오케이지. 냉장고의 온갖 채소 다 꺼내서 주먹만 하게 썰더니 덮밥으로 변했단다. 두 시간쯤 걸렸나 보다. 볶음밥이던 덮밥이던 먹여만 주면 땡큐지요. 그리하여 아점으로 채소볶음 덮밥이 탄생했다. 아, 짜다. 그래도 넘이 해준 밥은 참으로 달콤하구나.
식탁을 치우며 하는 말. "둘이 먹는데 뭐 이리 설거지거리가 많아?" 부엌일이 원래 그렇답니다. 다음엔 재활용 쓰레기들을 들고 또 한마디. "둘이 사는데 뭔 쓰레기가 이리 많아?" 살림이란 게 원래 그렇답니다. 둘이 산다고 세끼 밥을 한 끼 먹는 거 아니고, 둘이 산다고 집안일의 가짓수가 반으로 주는 건 아니다. 혼자 사나 둘이 사나 셋이 사나, 사람 손이 가야 굴러가는 살림살이는 다 똑같다.
마지못해 시작한 남편의 이중생활이 그를 얼마나 바꿀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소소한 일들을 하찮게 보는 버릇과 은근히 살림을 우습게 여기는 그 마음이 달라질 수 있을까? 아들이 대학 간 이후로 툭하면 튀어나오는 '둘이 사는데 타령'을 이제는 그만 들을 수 있을까? 결혼생활 22년을 통해 느낀 건 말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본인이 직접 몸으로 느껴봐야 한다. 고작 하루의 가사노동을 두고 너무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순조로울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은 나쁘지 않다. 그리고 유명한 명언도 있다, 시작이 반이라는. 당신의 이중생활, 적극 지지 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