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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Jul 23. 2020

삶이 흔들릴 때마다, 구급약

당신의 구급약은?

                                                                      

속이 더부룩하다. 또 소화가 안 된다. 나는 타고나길 위장의 기능이 약하다(오 신이시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주셨나이까). 의사 말을 옮기자면 '남들 열 번 움직일 동안 다섯 번 밖에 움직이질 않는다.' 위염은 별로 없지만, 소화에 문제가 생긴다. 그 때문에 사무실에 항상 사혈기를 놓아둔다. 비상약품 통에서 사혈기를 꺼내고 휴지도 몇 장 겹쳐 두텁게 만들어 놓았다. 준비 완료.


 자, 이제 손을 딴다. 언뜻 보면 사혈기는 고급 볼펜처럼 생겼다. 사용법도 볼펜과 비슷하다. 볼펜 심을 갈 듯 앞부분을 돌려 열어 일회용 침을 장착한다. 속에 가는 침이 박힌 하늘색 플라스틱 기구, 보통 ‘란셋’이라 부른다. 란셋의 동그란 앞모양은 따버리고 몸체를 사혈기에 끼웠다. 왼손의 엄지손가락부터 시작한다. 새삼 들여다본 내 손이 시커멓다. 땡볕 아래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 모양일까. 손가락은 또 얼마나 짧달막한 지. 가늘고 길고 하얀 손가락이 부럽구나. 정신 차리자, 지금 남의 손가락을 부러워할 때가 아니다. 어서 손을 따야지.

 


 손톱 오른쪽 모서리의 가로선과 세로선이 만나는 지점에다 볼펜을 꾹 눌렀다. 딸깍 하고 순식간에 침이 살갗을 찌르고 나온다. 따끔하다. 빨간 점이 생긴다. 손가락을 감싸고 눌러주면 점차 핏방울이 커진다. 검붉은 색이다. 두세 번 정도 피를 짜낸다. 다음엔 검지와 중지도 마찬가지로 따준다.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손톱의 바깥쪽 모서리를 딴다. 휴지는 방울방울 닦은 핏자국으로 얼룩덜룩하다. 이럴 때마다 드는 생각. ‘이 모습을 서양 사람들이 본다면 기절을 할 거야. 크크크. 아마 자해한다고 오해할지도 몰라, 스스로 피를 내고 있으니.’ 나 역시 피 묻은 휴지를 보는 게 그다지 달가운 일은 아니다. 얼른 휴지통으로 던져 넣었다.


 이윽고 속에서 ‘그윽!’ 하는 소리가 터졌다. 답답하던 속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역시 시원하게 트림이 나와야 제격이지. 윗배를 손으로 쓰윽 쓸어주고 꾹꾹 눌러보았다. 아까보다 낫다. 가끔은 손을 따도 피가 잘 안 나오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어쩐지 몸도 기분도 개운하지가 않다. 오늘은 피가 잘 나왔다. 위장에 숨통이 트였다.


 문득 의문이 생긴다. 마음이 체하면 무엇으로 뚫어야 할까? 꾹꾹 눌러 담는 건 방법이 아닐 테고. 그건 많이 해봤지만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마음에도 막힌 곳을 톡 찔러 줄 ‘바늘’이 필요하다. 무엇일까.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건 바로 '글쓰기'니까.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온전히 털어놓지 못하는 체증이 쌓이면 나는 노트를 편다. 한탄이건 한숨이건 하소연이건 무엇이든 털어놓는다. ‘쓰는' 행위는 마치 생물과 같아서 어느 순간 내 어깨를 두드리고 손을 잡아준다. 보일 듯 말듯한 실마리를 내밀고는 나를 이끈다. 그걸 따라 걷다 보면 결국 동굴 끝에 다다른다. 빛이 보인다. 삶이 흔들릴 때마다 곁에 두어야 할 구급약, 글쓰기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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