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째 되는 날.
항암 하고 14일이 되면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한다고 했다. 정말 빠질까? 손으로 머리카락을 훑어보았다. 뭐 한두 개 빠졌다. 이 정도야 평소에도 빠지니까. 오른쪽 귀밑머리를 쓱 훑었다. 대여섯 가닥이 빠졌다. 여러 번 해보았다. 그때마다 대여섯 가닥씩이 딸려 나왔다. 금세 침대 위에 머리카락 무더기가 쌓였다. 아, 정말 빠지는 건가? 머리카락들을 휴지통에 버리고 거울을 보았다. 이번에는 머리 이곳저곳을 다 훑어보았다. 왼쪽 귀밑머리, 뒤통수, 앞머리, 옆머리. 오른쪽 귀밑머리만 유난히 많이 빠졌다.
이제 시작인 거 맞는구나. 그저께 샤워할 때도 많이 빠지긴 했는데. 원래 나는 머리카락이 많이 빠진다. 샤워하고 머리 감을 때면 늘 수채 구멍에 까만 머리카락 뭉치가 한 움큼이다. 그래도 머리숱은 전혀 줄지 않았다. 빠지는 만큼 다시 또 났나 보지.
어릴 때부터 머리숱이 많았다. 색깔도 진한 까만색. 그래서 싫었다. 손은 작은데 숱은 너무 많아서 스스로 묶기가 힘들었다. 고무줄을 입에 물고 예쁘게 묶어보려고 낑낑대곤 했었지. 이 놈의 머리카락이 손에 잘 잡혀야 말이지. 파마를 해도 예쁘게 나오지 않았다. 너무 숱이 많으니 빠글빠글 한 아름. 적당히 숱이 없어야 파마도 세련되게 나오는 법이다. 그래서 가끔 세팅 파마를 하거나 생머리를 고수했다. 생머리가 가장 잘 어울렸다. 전체적으로 약간 곱슬기가 있어서 드라이만 잘하면 그런대로 볼륨 있는 스타일을 만들 수가 있었다. 게다가 머릿결이 찰랑찰랑 매끈매끈하니까.
지금도 생각난다. 대학 1학년 때. 나는 교지편집부에서 활동을 했다. 당시 커트머리였는데 어느 날 파마를 했다. 그때도 얼굴은 완전 어려서 중학생 같았는데, 머리만 아줌마 머리가 되었다. 크크. 다른 대학 편집실에 있던 친구 녀석.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가 막혀했다.
“너! 머리가 이게 뭐냐? 뭔 짓을 한 거야!”
사실 그 녀석이 날 좋아했더랬다. 사귀자는 걸 “됐거든!”하고 거절했었다지.
이제 중년의 내게 큰 흠은 흰머리가 아주 많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생기기 시작했는지. 뒤통수 쪽은 완전 반백이다. 아들에게 뽑아 달라기에는 이미 불가능한 상태. 마흔다섯이 그렇게 하얄 나이는 아닌데. 머리카락 나이는 10년쯤 더 먹었다. 그동안의 마음고생 때문이겠지. 몸은 참 정직하다. 스트레스가 넘치면 어디로든 그 결과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내 경우는 흰머리였다. 누가 보면 화들짝 놀랄 정도로 흰머리가 많으니까. 앞머리와 옆머리는 내 눈에 보이니까 열심히 솎아서 눈에 확 띄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뒤통수는 어쩔 수가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주로 속에 많고 겉에는 덜 해서 가려진다는 것. 짧은 커트를 치면 속 머리가 드러나 결국 다 탄로 나지만.
에구, 드디어 시작인 거구나. 남편은 어제도 물어보았다.
“머리카락은 아직 괜찮아?”
“응, 아직은.”
“빠지기 시작하면 바로 밀어버릴 거야?”
“봐서.”
“뭐, 머리카락 좀 빠지면 어때? 생명에 지장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다시 날 건데.”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되기까지는 오래 걸린다. 아무래도 이번 주 안에 머리를 밀어야 할 거 같다. 오늘이 2월 20일. 항암 4차까지 끝나면 4월 말이다. 5월부터 자란다고 해도 최소 6개월은 지나야 커트머리라도 되겠지. 총 8개월을 빡빡머리로 살아야 하는 거다. 으, 난 머리통도 납작하니 못생겼는데. 11월은 되어야 모자 벗고 다니겠구나. 아직 겨울인데 다음 겨울이 올 때까지 모자 인생이네.
머리가 빠지면 아예 밀어버리라고들 한다. 계속 빠지는 거 보면 우울하고 슬퍼지니까. 또 지저분하기도 하고. 나도 밀어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발은 사놓지 않았다. 굳이 가발을 쓰고 싶지 않다. 선배 환우들에 의하면 비싼 가발 사봐야 불편해서 몇 번 쓰지도 않는단다. 머리를 밀고 모자를 쓰고 다니면 진짜 암환자 티가 나겠구나. 아직까지는 항암 중이어도 머리가 그대로니까,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사실 머리가 빠진다고 그리 슬플 거 같지는 않다. 글쎄, 또 모르지. 나중에는 건드리기만 해도 술술 빠진다는데 그렇게 되면 급 우울해질지도.
하지만 내가 또 언제 빡빡머리를 해 보겠냐? 안은미도 아닌데. 새로운 스~따일이쥐, 뭐. 아, 두상이 못 생긴 게 한이다! 이럴 때 두상이라도 동글동글 이쁘면 얼마나 좋겠니?!
폴란드에서는 모두 머리가 짧았다. 남자들은 대부분 스포츠머리 비슷할 지경. 여자들도 거의 커트머리다. 보브컷이 많았다. 그때 느낌 - ‘동유럽은 짧은 게 대세군!’ 한국식으로 약간 긴 머리를 한 아들이 촌스러워 보였다. 폴란드 어디를 가나 유일한 동양인인데, 머리까지 튀니까 눈에 뜨였다. 나는 그녀들의 발랄한 머리가 맘에 쏙 들었다. 한국 돌아가면 나도 저렇게 짧은 머리 해봐야지!
“한새야, 저 여자 봤지? 엄마도 저런 머리 해볼까? 세련되지 않니?”
“엄마. 서양 여자들은 머리가 주먹만 하잖아. 그러니까 저렇게 짧은 머리가 어울리지.
엄마는... 글쎄?"
냉정한 녀석은 단칼에 내 꿈을 잘랐다. 야, 이 눔아. 엄마도 머리통은 작은 편이다. 다만 앞뒤로 납작해서 그렇지.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정말 머리를 짧게 쳤다. 더 더 치라는 말에 미용사는 놀랬다. 그러니까 뒤통수 흰머리가 더 도드라졌다. 염색을 했다. 그때 자르고 한 번 더 잘랐다. 이제는 정말 짧은 머리를 해야 할 순간이다.
아침 먹으면서 얘기를 했다.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다고. 남편은 낯빛이 굳어지고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표정관리를 하며 말한다.
“에이, 뭐 다시 날 건데. 더 빠지기 전에 얼른 밀어버리자!”
엄마도 얼굴이 어두워졌다. 막상 말을 하고 나니, 나도 왠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내일까지는 두고 봐서. 아무래도 이번 주 안에는 밀어야겠지. 머리 깎으면 진짜 환자 같겠다.”
그리고 나를 위로하는 남편의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글을 쓸 때는 담담한데 말을 하면 기분이 달라진다. 이러면서 또 슬쩍 머리카락을 쓸어 당겨본다. 아, 많이 빠진다. 역시.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내일 아침에 머리 밀러 가자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나는 조금 울었다. 조금만 울기로 했다. 그러고 나서 내일은 머리를 밀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