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남독녀 외동딸이 된 기분이다. 엄마 아부지 그늘 아래 있어본 게 얼마만인가. 부모님 정성을 흠뻑 받으니 헤실실 마음이 풀어진다.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 거 같다. 더 이상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저절로 마음을 녹이는 것. 이게 사랑의 힘이구나.
항암 시작 때부터 부모님이 와계신다. 엄마는 온갖 음식을 만들어 먹이시고, 아부지는 갖은 집안일을 챙기신다. 항암 할 동안 좀 돌봐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부모님께 무언가를 요구해 보기는 처음이다.
내가 젖먹이 시절 일이다. 그만 젖을 떼고 싶었던 엄마는 젖에다 쓴 약을 발랐다. 나는 단 한번 빨아보고는 바로 떨어지더란다. 동생은 그러거나 말거나 끝까지 젖을 먹었단다. 아기적부터 온순하고 착한 나는, 순종해야 살아남는다는 듯 조연 자리를 불만없이 받아들였다. 자라면서 안 되는 일에 대해 부모님께 매달려 본 적이 없었다. 늘 스스로 해결하고 살았다. 오 남매의 넷째로 태어난 운명이려니. 게다가 딸로도 두번째. 나에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사실을 태어나면서부터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그것이 맏아들도 맏딸도 막내도 아닌 중간에 끼인 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세였다.
결혼을 할 때도 그랬다. 언니는 숟가락 하나까지 엄마가 일일이 챙겨 주었지만, 내게는 그런 복이 없었다. 안그래도 빈약했던 가세가 아예 폭삭 기우는 중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어쩜 나는 조금도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아니 원망할 줄을 몰랐다는 게 정확하다. 결혼후 유별난 시집살이를 하는 중에도 그랬다. 엄마도 언니도 내 하소연은 흘려듣기 일쑤였다. 쉽게 말해서 무관심. 그래서 나의 표어는 오직,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하기. 마음이 갈가리 찢어져 쓰러지기 직전일 때조차도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평생 부모님의 안테나는 늘 장남과 장녀에게만 꽂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절. 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엄마한테 매달렸다. 나 너무 힘들다고 외롭다고. 나 좀 봐달라고. 이제는 그럴 수 있는 때가 된 것일까. 이번만큼은 달려와 주셨다. 기적이 별 것인가, 이런 게 기적이지. 엄마 아부지도 그동안 세월의 풍파를 많이 겪으셨다. 노년의 한가운데서 이제사 넷째도 바라볼 품이 생기셨다. 아직까지 그런대로 건강하시고 날 도와줄 에너지가 있으니, 이건 정말 기적이다.
지난 세월은 둘째 딸을 돌아보지 못하고 사셨다. 하지만 이렇게 가장 힘든 시기에 든든한 버팀목으로 와계시니, 그 모든 것이 괜찮다. 어쩌면 지금 날 지켜주려고, 그동안 힘을 비축해 두신 것인지도 모르지. 지금이 딱 좋다. 마흔다섯 중년의 나이에 부모님을 독차지해 볼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평생 못 한 걸 해볼 수 있어 얼마나 복인지.
엄마 아부지도 사실은 큰오빠나 언니만큼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진실. 난 이렇게 사랑을 받고 싶었던 거였구나. 부모님의, 가족들의, 친구들의 사랑과 관심. 그것을 받아보지 못하고 살았던 삶. ‘난 독립적이니까’에 가려진 내 욕구. 그건 타인의 긍정적인 관심이었다. 삶으로부터 고통받을 때 누군가 진심으로 나를 보살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내 마음이었다.
먼저 스스로 자신을 보살피는 힘이 있어야 하지만, 누군가 나 아닌 타인의 힘도 있어야 한다는 것. 인간은 혼자 살지만, 또 결코 혼자서만 살 수는 없다는 것. 안팎의 통합. 나와 남의 조화. 내게 부족했던 것이 그것이었다. 나는 많이 외로웠다. 겉으론 아닌 척, 씩씩한 척, 독립적인 척 했지만 진심은 늘 외로웠던 거다. 누군가 나만을 바라봐 줄 때의 충족감. 나는 원래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살다 보니 까맣게 잊었던 게다.
엄마 아부지께 사무치게 고맙다. 일흔아홉, 일흔넷 연세에 이렇게 건강히 계셔서, 날 지켜주시는 것에 너무나 감사하다. 어쩌면 그저 숨겨둔 마음만 있을 뿐, 표현도 못 하고 가버리셨을 수도 있었는데, 이러려고 여태 모진 세월을 견디셨나 싶다. 가시기 전에 사랑을 많이 못 준 작은딸을 보살피려고 말이다. 사람이 꿋꿋하게 살다 보면 못다 한 일을 마칠 기회가 오는 건가 보다. 기회가 또 온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이냐. 많은 기회를 가지려면 건강하게 살아남아야 한다.
부모님의 정성과 사랑이 묵은 원망을 살살 녹인다. 이런 거였어. 굳이 말로 가르치지 않아도, 진실한 사랑과 관심은 사람을 저절로 깨닫게 하는 힘이라는 것. 세상에 나가 무슨 일을 만나도 쓰러지지 않고 일어날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 세상을 살아갈 힘을, 고통을 견뎌낼 힘을, 사랑에게서 얻는 것이로구나.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건,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