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서는

수술, 방사선 치료

by 소율


이상한 일이었다. 수술을 하고 나서 마취가 깨자마자 불쑥 떠오른 한 마디.


‘제주도’


뭐야, 뜬금없이 웬 제주도? 며칠 전 제주도에 갔다 와서 그런가? 마치 잠에서 깨어나면 방금 전까지 생생했던 꿈을 모두 잊어버리듯, 왜 제주도가 떠올랐는지 수수께끼였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그리고 동시에 목구멍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다음 튀어나온 속말은 ‘아, 목이 아파 죽겠다!’ 아마 산소 호흡기를 몇 시간 동안 끼었던 터라 그랬나 보다. 그리고는 가슴보다도 겨드랑이 통증이 심했다.


암의 병기는 원래 수술을 하고 난 뒤에라야 정확히 나온다. 나는 2기였다. 오른쪽 유방의 종양 한 개 2.4센티. 겨드랑이 림프절 전이 2개. 수술 전 검사에서는 림프절 전이가 없다고 했다. 막상 열어보니 전이가 있었던 게다. 생각지도 않았던 겨드랑이 림프절 7개를 떼어 냈다. 이렇게 되면 오른팔은 평생 부종의 위험이 있다. 오른팔로 무거운 것을 들거나 상처가 나면 안 된다. 한 마디로 죽을 때까지 오른팔을 조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얘기. 게다가 앞으로는 배낭을 멜 수 없다! 나는 믿. 을. 수. 가. 없었다.


‘못 다한 동유럽을 다시 갈 건데, 배낭을 못 메다니!’


배낭을 메지 못한다면 여행의 폭이 훨씬 좁아질 수밖에 없다. 또 한 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에 직면했다. 어쩌겠니. 결국 이것도 받아들일 수밖에. “앞으로는 캐리어 끌고 다녀야겠는 걸? 여행 수준이 좀 럭셔리해지겠어!” 나중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러기까지에는 시간이 조금, 아니 많이 필요했다.


수술하고 2주 뒤, 방사선 치료가 시작되었다. 모두 33회. 약 7주 간 매일 방사선을 쬐었다. 그다음이 항암치료다. 보통 항암을 먼저 하고 방사선을 나중에 한다는데 나는 순서가 뒤바뀌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의사가 하라는 대로 할밖에. 항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방사선. 하지만 내 경우에는 항암 못지않게 힘들었다. 남들보다 유독 방사선 화상이 심했던 탓이다. 시커멓게 그을리는 건 기본. 물집이 여러 개 생겼다가 터졌다. 피부는 벌겋게 갈라지고 짓무르고. 가렵고 따갑고. 겨드랑이 림프절을 떼어낸 것 때문에 어깨 통증도 심했다. 견디다 못해 물리치료를 같이 받았다. 겨우 방사선 치료가 끝나자 이번에는 이석증이 생겼다. 귀에 이상이 생겨 어지러움을 느끼는 증상이다. 방사선 치료의 후유증 같았다. 수술한 오른쪽 가슴은 물이 차서 탱탱 부었다.

이렇게 고생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직 초짜 환자라 마음 다스리기가 힘겨웠다. 여행자에서 생활인으로, 다시 암환자로, 연이은 변신에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아직도 끊어진 내 여행이 가슴 아팠고, 여행기를 쓰다가 멈춘 내 블로그가 아른거렸다. 정신없었다. 나는 환자니까 무엇보다도 치료가 우선이다,라고 머리로만 생각했다. 마음은 자꾸 다른 데로 향했다. 치료 끝나면 여행기를 마저 써야지. 영어공부 다시 시작해야지. 아들 공부는 또 어쩌나. 그저 어서어서 이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렇다. 여전히 내 정체는 '여행자'였다. 내가 암환자임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생활인의 역할을 충실히 했으나 그것 역시 가짜였다. 껍데기만 달라진 세 번의 변신.


암 환자가 되면 누구나 하게 되는 말이 있다. ‘관계가 저절로 정리되더라.’ 먼저 겪은 선배님 말씀처럼 내 곁에 남을 사람들과 떨어져 나갈 사람들이 홍해처럼 갈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다.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오히려 담담했다. 수술과 이후 치료 과정에서 나는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더욱 아팠다. '내가 이렇게 중한 환자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동안 내가 어떻게 해줬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나?' 밀려드는 원망과 배신감. 작두 타는 무당처럼 날마다 감정이란 놈이 춤을 췄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지옥인데 설상가상으로 괜히 돌아왔다는 후회가 더해졌다. 수술하기 전까지는 잘 돌아왔다고 믿었건만. 갑자기 왔지만 그래서 암인 것도 알았고 수술도 빨리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수술하고 나서 더 이상 배낭을 멜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유방암은 진행이 그리 빠른 암이 아니어서 수술하기까지 한두 달 기다리는 경우도 흔했다. 계획대로 여행을 끝내고 왔어도 예후에 큰 상관이 없을 터였다.


유방암은 진행이 그리 빠른 암이 아니다. 병원 일정상 수술하기까지 한두 달 기다리는 경우도 흔하다. 계획대로 한두 달쯤 여행을 더 하고 왔어도 예후는 상관없을 터였다. 가슴이 미어졌다. 아직 몸이 멀쩡했을 때 여행을 마쳤어야 했다고. 장기여행을 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였는데. 머리보다는 가슴이 하는 말을 들었어야 했다고. 자신을 가장 사랑하겠노라고 여행을 떠났지만 결국 또 나보다 타인을 중심에 놓고 말았구나.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있던 도리와 의무감에 또 나를 팽개쳐 버렸구나 하는 자괴감. 누구보다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스트레스 때문에 암이 생겼는데 또 스트레스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걸 알면서도 개미지옥에 빠진 것처럼 헤어나기가 어려웠다.


이런 스트레스는 곧장 독으로 변해 몸을 공격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실제로 그랬다. 스트레스받은 날에는 전에 없던 물집이 갑자기 생겼다. 있던 물집도 느닷없이 터져 버렸다. 두통이 심해지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절대 스트레스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누가 스트레스를 준다고 그걸 냉큼 받으면 안 되는 거였다. 또한 스스로 스트레스를 만들면 안 되는 거였다. 잘잘못을 떠나 내가 살아야 하니까. 살기 위해서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더니 7주가 지나 방사선이 끝났지만 끝나지 않았다. 2주일 동안 또 다른 병원에 다녀야 했다. 화상과 이석증 치료 때문이다. 이석증이야 대단치 않은 병이라지만 화상 쪽은 골치 아팠다. 화상 전문 병원을 따로 찾아가야 할 정도였으니까. 남자 의사 앞에서 웃통을 벗고 수술한 가슴을 내보여야 하는 상황은 정말이지, 휴우.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날씨는 또 왜 그리 추웠는지. 화상이 낫기까지 총 5주를 기다려야 했다. 방사선과 항암까지의 간격이 남들보다 유난히 길었다.



그동안 나는 항암 치료 준비를 했다. 바로 마음 다스리기. 수술 후에도 꾸준히 책을 읽었지만, 이 기간 동안 특히 도움 되는 심리학 책을 많이 읽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항암치료는 무조건 즐겁게 기쁘게 받겠다고 결심했다.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피신을 했다. 그게 사람이든 일이든. 항암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다른 것들과 씨름할 여유는 없었다. 한마디로 '삼십육계 줄행랑'.

동시에 내게 기쁨을 주는 일을 했다. 예를 들자면 설 연휴에 남편과 아들과 나, 세 식구의 제주도 여행 같은 것. 병원에 질려버린 나를 위한 휴식 여행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행복했다. 유방암을 겪은 이후로 유독 제주도에 자주 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수수께끼의 해답이었나? 수술하자마자 떠올랐던 제주도란 단어는 우연보다 필연이었나 보다.


또 하나, 열심히 일기를 썼다.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힘든 가슴속 응어리를 흰 노트에 토해냈다. 무한히 들어주고 받아주는 글쓰기는 나를 지켜주는 버팀목이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온갖 하고 싶은 말을 적다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숨통이 트이듯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곤 했다. 마치 저 우주에서 혹은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내 손을 통해 해답을 슬쩍 보여주는 것처럼. 그러면 나는 곧 의기충천해졌다. 글쓰기는 나의 기도요 구원이자 종교였다. 만약 글쓰기라는 동아줄을 죽기 살기로 붙잡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