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피엔스에게 ‘걷기’란 굳이 운동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닐까. 적어도 내가 고향에서 살던 시절엔 그랬다. 충청도의 소도시 충주는 코딱지만큼이나 작았다. 시내 번화가를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걸어가면 같은 사람을 세 번씩 마주칠 정도였으니. 어른부터 어린아이들까지 걷는 건 숨 쉬듯 당연한 일이었다. 부모님이 장사하시던 시장도 가까워서 하루에도 몇 번씩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 듯했다. 국민학교, 중학교 역시 학교가 집에서 엎어지면 코앞이었다. 나는 어깨에 가방을 메고 친구들과 조잘조잘 팔랑팔랑 걸어 다녔다.
충주여고에 입학하자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10년 넘게 살던 시내 집에서 외각 동네로 이사를 했다. 그 바람에 이전과는 달리 학교까지 꽤 멀어졌다. 그건 단순한 이사가 아니었다. 부모님의 가게가 폭삭 망하다시피 해서 쫓기듯 변두리로 떨려 나간 것이다. 40분 정도를 아침저녁으로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즉 하루에 1시간 20분을 3년 동안 걸어야 했다. 버스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노선이 편리하지 않았다. 학교에 가려면 집에서 버스 정거장까지 한참 걷고 버스에서 내리면 또 학교까지 걸어가야 했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걷는 것, 버스 타는 게 훨씬 번거로웠다.
특히 여름이 고역이었다. 교복을 입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등교하는 시간엔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중간에 위치한 공고 앞을 지나갈 때마다 남학생들이 흘긋거리는 게 그렇게 싫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마의 공고 구간을 미친 듯이 걸어갔다. 학교에 도착하면 얼굴은 발갛게 달아오르고 흰색 교복 등과 겨드랑이가 흠뻑 젖어 있었다. 지은 죄도 없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걷기 친화력은 이때 완성되었을 것이다. 땀으로 얼룩진 등하굣길에서. 어쨌거나 의도치 않았던 걷기 능력만 익혔으면 좋았으련만 인생이 그리 친절하던가.
크게 부족함이 없었던 중학생 때와 달리 분기마다 내는 몇만 원의 등록금을 내지 못할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 기한까지 등록금을 내지 못한 아이들은 툭하면 서무실에 불려 다녔다. 그것도 몇 번씩. 수업시간에 느닷없이 벽에 붙은 스피커에서 방송이 나온다. “아아. 잘 들리나? 1학년 1반 김**, 박**, 2학년 3반 이**, 윤**, 3학년 강**, 신**...... 너희들은 즉시 서무실로 오기 바란다!” 왜 오란 말은 없어도 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아이들은 없었다. 명백한 인권 침해였지만, 당시에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가난함 공개’를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신발 바닥에 달라붙은 끈적한 진흙처럼 발자국마다 수치심이 따라다녔다.
세월이 흘러 걷기가 다시 삶으로 들어온 건 결혼한 이후였다. 우리는 경기도 과천시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알고 보니 과천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면적이 좁은 도시란다. 내 고향 충주보다 작을 줄이야. 그래서 싫었냐고? 아니 반대였다. 덕분에 시골 읍내처럼 걸어서 모든 볼일이 가능했으니까. 보통 집에서 10분~20분을 걸으면 중심가에 다다른다. 서울대공원 역시 인근에 있기에 걸어 다녔다. 과천 시내에서 대공원까지 갔다가 호수를 한 바퀴 돌고 오면 대략 1시간이 걸린다. 아이가 어릴 땐 대공원까지 유모차를 밀었고 이후엔 같이 걸었다. 딱히 운동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다. 결혼하고 거의 그렇게 지냈으니 생활로서 걷기가 몸에 배었다. 덕분에 살찌지도 마르지도 않은 몸을 유지했던 것 같다.
작은 도시의 단점도 많지만 그것을 상쇄하는 가장 큰 이점은 자연스레 걸을 수 있는 환경이라 생각한다. 중간에 근처 도시로 두어 번 이사했던 적이 있지만, 결국 돌아온 건 과천만큼 편하게 걸을 데가 마땅치 않아서였다. 우거진 가로수 아래로 걸어 다니는 일상이 어디에서나 가능한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어느덧 26년째, 고향 충주에서보다 긴 세월을 이곳에서 살고 있다. 돌아보면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열아홉까지, 그리고 스물여덟에서 쉰 중반 지금까지, 인생의 대부분이 걷기와 친밀했다. 어쩌다 얻어걸린 드문 행운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