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매일만보

폭풍과 징검다리

by 소율

어릴 적 읽었던 동화는 늘 “그래서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난다. 결혼생활의 걸음걸음마다 꽃길이었다고 고백하고 싶지만, 현실이 동화와 다르다는 건 요즘 초등학생조차 알고 있다.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못한 탓인지 나에게 꽃길이 펼쳐지진 않았다. 결혼 16년 차에 이르러 나는 참고 버텨온 아내와 며느리 노릇에서 무조건 탈출하고 싶었다. 이혼한 후에 세계여행을 떠날 것이냐, 여행을 다녀온 후 이혼을 할 것이냐 하는 고민 속에서 마음이 불타는 지옥이었다.


가만히 집안에 널브러져 있으면 머릿속에서 막장 드라마가 시작되어 시즌 1, 2, 3... 끝도 없이 이어졌다. 눈만 뜨면 매일 걸었다. 앉으면 토해내듯 일기를 썼다. 그렇게라도 몸과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면 도저히 24시간을 견뎌낼 수 없었다. 걷기와 글쓰기. 잠시나마 드라마의 정지 버튼을 누르는 방법이었다. 하나는 몸을 꺼내어 밖으로 나가고 다른 하나는 마음을 꺼내어 글로 옮긴다. 두 개가 완전히 달라 보이지만 ‘변화’를 추구한다는 본질이 같았다. 한마디로 관성의 법칙을 깨는 것이다.


악조건 속에서 드디어 열여섯 살 아들과 함께 세계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여행을 끝마치지 못하고 6개월 만에 돌아왔다. 가족의 부고 때문이었다. 불운은 혼자 오지 않는다는 듯 다른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귀국한 지 한 달 만에 덜컥 유방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이혼이고 뭐고 당장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나는 몰아치는 폭풍 속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유방암 환자는 보통 수술, 항암 주사, 호르몬 주사, 방사선 등의 치료를 받는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한두 가지 건너뛰기도 한다는데 나는 하나도 비껴가지 못했다. 착실히 네 가지를 전부 받으며 인생 최고 몸무게를 찍었다. 유방암 치료 중에 환자들은 대부분 몸이 붓고 살이 찐다. 수술 후유증으로 가슴에 물이 차기도 하고 각종 주사는 몸을 붓게 만든다. 특히 항암 주사를 맞으면 백혈구 수치가 떨어지지 않도록 고기 위주의 고단백질 식사를 하는 탓에 살이 찌는 경우가 많다.


밀어버린 머리카락만큼이나 둥실둥실한 몸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바람을 잔뜩 불어넣은 풍선 인형 같은 여자가 거울 속에 서 있었다. 낯설었다. 나인 듯 내가 아닌 듯한 어색함. 그때 결심했다. 모든 치료가 끝나면 저 부기부터 빼야겠다고. 우여곡절 끝에 공식적인 병원 치료를 마친 뒤 나는 매일 집 근처 낮은 산길을 걸었다. 특별히 ‘걷기’를 선택한 이유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유리그릇 같은 환자 체력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활동이 걷기였고 마침 걸을 만한 장소가 가까이에 있었을 뿐. 걸은 지 석 달 만에 예전에 가깝게 몸이 가벼워졌다. 바닥이다 못해 땅굴까지 내려앉았던 체력이 조금씩 회복되고 부은 건지 찐 건지 모를 외모도 제자리를 찾았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빠른 성과를 보았다. 걷기와 나는 역시 찰떡궁합일까.


겉모습이 얼추 돌아오자 멈추었던 일상도 돌아가기 시작했다. 보통 암을 겪은 사람들은 음식 관리에 목을 맨다. 나는 내 병의 원인을 스트레스라고 생각했기에 음식보다는 마음 관리에 집중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1번 ‘하기 싫은 것 안 하기’와 2번 ‘하고 싶은 것 하기.' 두 가지가 나만을 위한 맞춤 치료 세트였다.


1번을 위해 먼저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었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과감히 끊었다. 진즉에 했어야 하는 그러나 너무나 어려운 과제였다. 그걸 못 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었고 더불어 재발이나 전이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 살기 위해서 악착같이 용기를 냈다.


2번의 최우선 목표는 아들과 함께한 세계여행 에세이를 출간하는 것. 평생의 도전이었던 세계여행을 중단했고 쓰고 있던 여행기를 마치지 못한 것이 아깝고 아까웠다. 그것만이 머리에 가득했다. 마당의 잡초처럼 삐죽삐죽 솟은 머리카락이 자랄 동안 열심히 초고를 쓰고 고쳤다. 드디어 2014년 첫 책 ‘고등학교 대신 지구별 여행’을 출간했다.


동시에 약을 한 보따리 싸 들고 살금살금 여행을 시작했다. 가까운 중국, 일본, 대만부터 스페인, 독일, 프랑스, 인도네시아, 베트남, 알래스카 등을 돌아다녔다. 후반전 여행에서는 배낭 대신 캐리어가 새 친구가 되었다. 남들 보기엔 전혀 암 환자가 아닌 것처럼 나는 점점 영역을 넓혀갔다.


2018년엔 여행연구소를 열고 두 번째 책 ‘중년에 떠나는 첫 번째 배낭여행’을 출간했다. 여행 강의를 했고 여러 가지 모임을 운영했다. 그렇다고 암 환자라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6개월에 한 번(5년까지), 1년에 한 번씩(5년 이후) 종합검사를 받을 때마다 재발에 대한 걱정을 떨치기 힘들었다. 희망을 품으면 건너편에 걱정이 또 걱정을 넘으면 희망이 자리했다. 징검다리처럼 놓인 빛과 어둠을 아슬아슬하게 밟으며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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