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매일만보

14-1 코스에 꿀 발라놓았나?

제주올레 14-1 코스의 백미, 저지곶자왈

by 소율

제주 올레 14-1코스를 처음 간 것은 세계여행을 떠나기 두 달 전, 2011년 2월이었다. 아들과 나는 모슬포 근처의 게스트하우스에서 5일을 머물렀다. 하루 이틀 묵는 게 보통인 그때 우리는 장기투숙객이라 할 만했다. 자연히 숙소 주인장과 친해졌다. 하루는 우리가 14-1코스를 가려고 했을 때, "글쎄요... 겨울엔 그다지 권하지 않는데요. 썰렁하고 황량할 겁니다"라며 말리는 것이었다. 대신 아름다운 바닷가 길이라며 12코스를 추천했다.


나는 살짝 마음이 흔들렸으나 고집쟁이 아들, 강력히 14-1 코스를 가자고 주장했다. 하긴 바닷가 길은 12코스 아니라도 많이 가보았다. 우도(현재 1-1코스)랑 7코스도 대표적인 바닷가 길이고 전날 숙소에서 송악산을 거쳐 모슬포 항구까지 걸었던 길도 바닷가 길이었다. 거기서 다시 섬인 가파도를 갔다 왔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만하면 바다는 실컷 보았다. 우리는 과감히 주인장의 충고를 무시하기로 했다.


14-1코스는 18.8km, ‘난이도 상’에 해당했다.

<저지마을회관-문도지 오름-저지곶자왈-오설록-청수곶자왈-무릉 곶자왈-인향 마을-무릉 생태학교>

곶자왈이 무려 3개나 몰려 있는 곶자왈 집중길이었다. 곶자왈 더하기 오름 하나, 한마디로 대부분이 숲길이다. 사람 없는 숲속 길을 하염없이 걸어보는 것. 이 점이 우리를 홀렸다.

그러나 2017년 5월부터 절반이 잘려나가 9.3km가 되었다.

<저지예술 정보화 마을-강정 동산-저지곶자왈-문도지오름-저지 상수원-오설록>


간단히 말해 가운데 오설록에서 길을 팍 끊은 것이다. 사유지를 더 이상 개방하지 않아 그리 된 걸로 안다. 제주올레길은 상황에 따라 이렇게 코스가 달라지기도 한다. 길이 반이나 줄어들어 14-1 코스만의 매력이 뚝 떨어졌다. 바뀌기 전에 더 자주 갈걸, 실로 안타깝다.


주의할 점은 이 길은 도중에 식당이나 매점이 전혀 없다. 물과 먹을 것을 충분히 챙겨가야 한다. 또 중간지점인 오설록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빠져나갈 샛길도 없다. 출발지점으로 다시 돌아가든가, 오설록까지 가든가. 둘 중에 하나. 오설록에서 거의 끝 지점까지도 역시 다른 샛길은 없었다. 길이 너무 길어 중도에 나가고 싶다면 오설록에서 빠져야 한다. (지금은 어차피 오설록까지 밖에 못 감) 택시를 부르는 것도 불가능하다. 무성한 숲 한중간에 사람 하나 겨우 걸어갈 만한 좁은 오솔길로 어떻게 택시가 들어올 수 있겠는가? 오직 사람과 말, 소만 다녀간 흔적이 있다. 순수하게 자신의 몸만을 사용해야만 받아들여지는 곳이랄까.


오르막도 없고 평탄한데 이 길이 왜 <난이도 상>일까 궁금했다. 아마 이렇게 끝까지 가야만 하는 특성 때문이 아닐까. 시작점인 저지마을회관에서 9시쯤 출발해서 4시쯤에 인향 마을에 도착했다. 사진 찍으면서 아주 천천히 걸어서 7시간 걸렸다.


곶자왈 세 개 중 무릉 곶자왈은 <아름다운 숲길>로 지정된 곳이다. 많은 분들이 무릉 곶자왈 칭찬을 했다. 그러나 정작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저지곶자왈이었다. 코스를 걷기 시작하면 양쪽에 숲을 두고 시멘트 도로가 한참 이어진다. 구불구불 걸어가다 보면 이윽고 문도지 오름에 도착한다. 올라갈 때는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정상에서 숲과 밭이 펼쳐진 모습이 시원시원하다. 아들은 문도지 오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말 몇 마리가 앉아 졸면서 풀을 뜯고 있었다.


오름은 참 신기하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선뜻 꼭대기를 내어주면서도,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늘 감탄스럽다. 조각보처럼 펼쳐진 밭이며 오종종한 작은 숲과 누런 풀밭이며 그 사이로 난 오솔길. 덤으로 마음까지 흔드는 세찬 바람까지. 적은 수고로 참 많은 기쁨을 내어주는 관대함. 세상에 이런 이치가 어디에 또 있을까?


오름을 내려와 오솔길로 접어들면 '여기가 과연 제주도 특유의 원시림이구나!' 싶은 빽빽한 숲길이 이어진다. 저지곶자왈이다. 구멍 숭숭 난 까만 현무암 돌로 오솔길을 만들어놨다. 이끼가 푸릇푸릇 덮여 있는 현무암 돌길. 오직 제주도에서만 있을 수 있는 곳. 겨울이라 숲이 무성하지 않은데도 여전히 푸른 잎들은 남아 있었다. 검은 돌이 안내하는 마법의 숲이라니! 그 끝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없이 빨려 드는 마력의 공간이다. 기꺼이 그 유혹에 빠지고 싶었다.


공생인지 기생인지 모르게 다른 나무를 휘감고 올라간 덩굴. 전생에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애달파하듯 서로 얽히고 붙어버린 나무들. 침입자를 용서하지 않겠다며 가시를 잔뜩 내미는 나뭇가지. 아직도 고대인 양 무성한 양치식물들. 그리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숲의 향연. 숲에 온몸과 영혼을 푹 적셔보는 그 느낌.


이곳에서는 종종 길을 잃어버린다고 한다. 혼자보다는 둘 이상 같이 가기를 권하는 지역이다. 혼자 걷는다면 좀 무섭겠지만 자연과 나만이 교감하는 기쁨은 더욱 크겠지. 허나 겨울이라면 길을 잃을 염려는 놓아두시라. 우거진 잎들이 없어 오솔길의 까만 현무암이 길잡이 노릇을 톡톡히 한다. 매달아 놓은 리본도 눈에 잘 뜨인다. 여름, 가을에는 헤맬 수도 있을 거 같다. 대신 우거진 곶자왈의 정수를 맛보겠지?


걷다가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무슨 소리가 들린다. "스사~악 스사~악" 바람은 안 부는데 분명 바람 소리가 들린다. 어디서 부는 바람일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나무 꼭대기가 일렁일렁 흔들린다. 착한 바람은 나무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무시무시한 마법의 숲인 줄 알았더니 속마음은 부드러운 정령이 사나 보다. 마치 영혼의 소리 같은 바람 소리가 들린다. 피부로는 느낄 수가 없는데 소리만 들린다. 우리는 자주 멈추어 그 소리를 들었다. 이럴 땐 눈을 감으면 더 가슴 깊이 나무의 소리, 바람의 소리가 들려온다. 어쩌면 곶자왈의 숨소리일지도.


내가 14-1코스를 찾는 이유의 팔 할은 저지곶자왈 때문이고 저지곶자왈을 좋아하는 이유의 팔 할은 이 바람 소리 때문이다. 내 영혼과 저 바람이 공명하며 괜찮다, 괜찮다 위로하고 있었다. 이 소리를 들으면 어쩐지 이 한 해도 잘 살아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묘한 것은 이 소리는 저지곶자왈에서만 들린다는 것. 다른 곶자왈에서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래서 유독 저지곶자왈이 내게는 사랑스럽다.


오설록에 도착하기 전까지 저지곶자왈은 '어디가 과연 끝일까?' 싶을 정도로 길었다. 숲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실컷 걷고 실컷 감탄하며 실컷 느끼기에 충분했다. 곶자왈과 한바탕 진한 연애를 하고 나온 느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유럽에나 가야 볼 수 있을 거 같았던 원시림이 바로 제주도에 있었다. 이전에는 그저 피상적으로 숲을 좋아했다. 그냥 막연히 숲 속의 오솔길을 걸어보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이제 곶자왈을 걸어보니 '아, 내가 진짜 숲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걸 알았다.


우리 국토의 70%가 산지. 산은 참 많다. 등산 인구도 엄청나다. 힘겹게 오르막을 올라야 하는 산 말고도 손쉽게 갈 수 있는 숲이 많았으면 좋겠다. 정상을 정복(?)하는 데 의미를 두는 산이 아닌, 그냥 가벼운 차림으로 소풍 가듯 즐길 수 있는 온화한 숲. 이런 숲이 어디에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요즘 걷기 열풍으로 숨어 있는 숲길들이 새롭게 발굴이 되었다.


그곳에 홀딱 반해서일까? 이후의 청수곶자왈은 너무 밋밋했다. 뜻밖에 넓은 시멘트 길이어서 실망스러웠다. 처음에는 이 청수곶자왈이 그 유명한 무릉 곶자왈인 줄 알았다. '뭐가 이래?' 하는 마음이었는데 역시. 가다 보니 진짜 무릉 곶자왈이 나타났다. 이곳도 아름다웠지만 이미 저는 저지곶자왈과 연애에 빠진 몸이었다. 무릉 곶자왈은 눈에 차질 않더라.


숲길을 한참 가다 보면 무릉 곶자왈만의 독특한 장소가 있다. 무너진 현무암 돌담에 둘러싸인 움푹 파진 땅. 겨울인데도 나무가 무성해서 햇빛이 안 들어온다. 그곳은 마치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의 사원 '따 프롬' 같은 느낌이었다. 거대한 나무뿌리가 사원을 휘감아 무너뜨리고 있는 곳. 그렇게 거대한 현무암 돌담은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그랬다. 으스스하고 어둠 컴컴한 땅. 귀신이라도 툭 튀어나올 것 같은 음습한 느낌. 하지만 겁낼 건 없다. 몇 걸음만 걸으면 헷빛이 쏟아지는 양지로 나오니까.


숲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올레 14-1코스는 그야말로 축복의 길이었다. 이 코스만큼 제주도 특유의 숲길을 오래오래 만끽할 수 있는 길은 아마 없다. 우리의 히치 하이킹에 차를 태워주신 여자분이 그러다. "제주도 주민이 올레길을 더 몰라요. 살면서 바쁘다 보니 일부러 가게 되지는 않더라고요. 육지 분들이 더 잘 아시데요." 졸지에 제가 '더 잘 아는 육지분'이 되어 버렸다. 저지곶자왈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이다.


숲의 정령과 함께 끝없이 걷고 싶을 때는, 그곳.

저지곶자왈로 가겠다.




14-1 코스 축소로 인해 현재는 청수곶자왈과 무릉곶자왈을 갈 수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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