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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매일만보

그 섬에 가는 이유

오직 걷기 위해

by 소율

“당신이 가장 추천하는 한국의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해외에서 만나는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종종 듣는 질문이다.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제주도!”라고 답한다. 특히 아름다운 올레길을 꼭 걸어보라고 강조한다. 제주올레와 나는 조금 특별한 인연으로 만났다.


제주올레를 개장하던 해(2008년)에 온라인 서점 예스 24에서 대대적인 홍보 이벤트를 벌였다. 이벤트 게시판에 댓글을 달아 당첨이 되는 20명에게 1박 2일 제주여행을 보내주는 것이다. 게다가 제주올레를 만든 장본인 서명숙 씨가 인솔하는 걷기 여행이라니! 안 그래도 신문에 난 제주올레 기사를 냉장고에 붙여놓고 언젠가 가봐야지 벼르고 있던 차였다. 나는 합격하겠다는 일념을 담아 신중하게 댓글을 적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며칠 뒤 예스 24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수백 명의 경쟁을 뚫고 내가 20인 중 한 명이 되었단다! 남편과 초등학생 아이를 두고 혼자 여행을 가는 일은 상상도 못 했는데 공식적으로 당당하게 (그것도 무료로) 가게 될 줄이야.


비가 흩뿌리는 11월의 제주, 전국에서 행운아 스무 명이 모였다. 대부분 20대 여성이었고 기혼 아줌마는 단 세 명. 평생 당첨 운이라곤 없던 내가 어떻게 뽑혔을까? 궁금하면 물어보는 것이 인지상정. 나는 예스 24 직원에게 놀라운 답을 들었다. 수백 개의 댓글을 일일이 모두 읽고 20명을 뽑았다고 한다. 주최자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는 진솔한 사연이 기준이었다. 무작위 추첨이었다면 분명히 떨어졌을 텐데, 꼼꼼하고 엄격한 기준이 오히려 나에게 유리했던 것이다.


우리는 카리스마 넘치는 서명숙 씨와 함께 1코스와 6코스, 7코스의 일부를 걸으며 올레길에 얽힌 사연을 들었다. 어떻게 올레길을 만들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닥친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뒷이야기가 흥미진진했다.


또한, 그녀는 오래된 식당에서 제주도 특유의 음식을 맛 보여주었다. 특히 갈칫국에 나는 반했다. 생선으로 국을 끓인다고? 그런데 전혀 비리지 않고 담백한 이 맛은 뭐지? 이후 나의 제주도 최애 음식은 딩동댕, 바로 갈칫국.


즐거웠던 이벤트 덕분에 마음속에 ‘제주도=올레길, 제주여행=걷기 여행’이란 공식이 새겨졌다. 단 이틀이 한 사람의 인생에 제주도를 콱 박아 넣은 것이다. 이모저모로 이벤트는 대성공이었다.


올레 경험을 기점으로 제주도는 마치 다른 장소처럼 느껴졌다. 이전에는 가까이하기에 멀고도 비싼 당신이었다. 차를 빌려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달리고 달려 관광지를 찍는 것, 남편이 주도해야만 갈 수 있는(구슬픈 장롱면허 소지자여!) 가족여행이었다면, 두 다리가 성한 한 언제라도 가능한 자유여행으로 승격했다.



다음 해 봄부터 본격적으로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매년 또는 격년으로 오직 걷기 위해 제주도에 간다. 아들과 함께 4박 5일 내내 걷기도 했고 혼자서 띄엄띄엄 일주일을 걷기도 했다. 올레길은 현재 21코스 26개까지 늘었다.


당연히 완주했겠거니 예상하시겠지만, 또 실망을 드린다. 나는 총 16개 코스를 걸었다. 청개구리 체질 아니랄까 봐 역시 1코스부터 순서대로 전 코스를 완주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다. 대신 입맛에 맞는 곳을 여러 번 걷는다.


제주올레 대부분이 해안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도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제주 특유의 초록빛 바다를 정말 사랑하지만, 작열하는 태양 아래 구슬땀을 흘리며 몇 시간이고 해안 길을 걷는 건 사양한다. 바다는 잠깐씩 바라보며 커피 한 잔 마시는 게 젤로 낭만적이지.



경험치가 쌓일수록 오름과 숲길이 포함된 코스를 골랐다. 가장 많이 갔던 코스는 14-1코스. 다섯 번을 걸었다. 이제는 올레길을 넘어서 내가 좋아하는 숲길과 곶자왈을 위주로 찾아다닌다. 올레길 걷기에서 숲길 걷기로 한 단계 진화했다.


제주도 걷기 여행은 준비랄 것도 없이 간단하다. 섬의 동서남북 중 어디를 걸을 것인가만 정하면 끝. 나는 한 번의 여행에 제주도 전체를 때려 넣는 계획은 짜지 않는다. 네 방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집중한다. 불필요한 이동시간과 그에 따른 비용, 에너지 소모가 줄어드니 여행이 단순해진다. 번거롭게 렌터카를 이용할 이유가 없고 말이지. 커다란 짐가방 역시 필요없다.


또한 예쁜 옷에도 신경을 끈다. 옷은 땀이 잘 마르고 가벼운 것, 또는 바람을 막아주고 따뜻한 것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대놓고 나 등산복임네 티 내는 건 촌스러워서 싫다. 일상복과 등산복의 중간쯤 되는 기능성 옷들을 챙긴다. 구태여 맛집을 찾아다니지도 않는다. 걷다가 때 되면 동네 식당에서 한 끼 먹고 걷다가 다리 아프면 근처의 카페에서 쉰다. 제주도 한정 복이 넝쿨째 굴러들어 오는 팔자를 타고났는지 대충 들어간 곳들이 대부분 맛있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콧바람이 간절할 때, 잡념이 가득한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약간의 공백이 생겼을 때, 평소보다 길게 걷고 싶을 때, 그리고 일상에서 한 발쯤 물러나고 싶을 때. 조용히 스며들 수 있는 휴식처이자 든든한 안식처. 제주도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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