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도지? 16도! 하룻밤 새 온도가 3도나 떨어졌다. 핸드폰의 ‘일기 예보’엔 낮 12시까지 20도 이하. 앗싸, 오늘은 진짜 시원하겠다. 알람이 울리거나 말거나 대충 꺼놓고 이불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안심하고 다시 잠들었던 것 같았다. 갑자기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직 안 나갔네?” 남편이었다. “응, 오늘은 시원해서 천천히 나가도 되겠어.” 늦어도 7시 반이면 집을 나서는데 웬일인가 싶었나 보다. 시계를 보니 벌써 8시네? 어이, 정신 차리고 나갈 준비를 하게나.
나에게 있어 운동과 기온은 밀접하고 미묘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예를 들어 9월만 해도 7시 반에 21도라면 걷는 사이 순식간에 3, 4도가 올라 더워진다. 내가 누구인가, 더위라면 질색하는 철저한 그늘 추종자가 아닌가. 가능하면 태양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 기온이 아직 낮은 시간에 걸으러 간다. 부지런함과는 전혀 상관없다. 순전히 더위를 피하려는 꼼수일 뿐이다.
10년 전부터 여성 호르몬을 억제하는 치료를 받았고 지금은 자연적인 완경조차 한참 지났다. 흔히 일컫는 갱년기 증상을 오랫동안 겪어왔다는 뜻이다. 속에서 열이 올랐다 내렸다 주관적인 체온이 널을 뛴다. 이제 더위라면 기를 쓰고 줄행랑을 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고 추위에 강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어서, 더위만큼 추위에도 치를 떤다. 반(反) 전천후로 기능성이 떨어지는 몸이 되시겠다. 어쩌겠냐고. 이런 몸이라도 소중하게 달래 가며 쓰는 수밖에.
근래 들어 처음으로 긴 팔 등산복을 꺼냈다. 혹시 추울까 봐 얇은 바람막이도 챙겨 넣었다. 후훗, 본격적인 가을이런가. 오늘은 월요일이자 대체 공휴일, 연휴 마지막 날이다. 경험상 연휴의 중간에는 등산객이 몰리나 마지막 날엔 한가한 편이다. 오랜만에 청계산 매봉에 다녀와야지. (청계산엔 매봉이 두 개 있다. 과천 쪽 매봉은 데크로 쉼터를 만들어 놓은 곳이다) 매봉은 우리 집에서 최단 거리로 1시간이면 도착한다. 나름 등산이니까 밥을 든든히 먹고 스틱을 움켜쥐고 집을 나선 시각은 8시 50분. 평소보다 늦었지만, 여전히 시원했다. 다행이다.
속으로 왕복 코스를 계산했다. 올라갈 땐 하체 단련을 위해 계단 위주의 직진 길로, 내려올 땐 최대한 에둘러 돌아가는 오솔길로. 총 2시간 30분 예상. 이 방법이 무릎 부담이 적고 종아리에 알이 배기지 않는다. 계단 길로 올라갔다가 같은 길로 내려오면 항상 종아리가 아팠다. 그게 풀어지려면 족히 삼사일이 걸린다.
선선하다 못해 싸늘한 등산로엔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다. 어제 내렸던 비로 산은 아직 축축하고 바람에도 습기가 묻어났다. 여름의 열정을 통과한 잎사귀들은 어쩐지 기운이 빠진 모습이다. 아직 초록이지만 곧 시들 것처럼 스산함이 배어 있었다. 아니다, 단풍이 들면 한 번 더 반짝 빛나겠지. 마지막 힘으로 예쁘게 물들곤 장렬하게 떠나겠지. 아직 평탄한 오솔길이라 편안하게 걸었다.
가로등과 표지판이 나란히 서 있는 갈림길에 다다랐다. 2300보. 정면 계단을 오르면 매봉 가는 길, 왼쪽으로 빠지면 ‘매봉 1 약수터’로 가는 길. 갈 때는 직진 인생! 여기부터 계단과 오르막이 번갈아 이어진다. 곧 소나무가 모여 있는 비탈길을 만났다. 3300보.
소나무마다 뿌리 쪽에 짧은 원통형의 나무 울타리들을 둘러쳐 놓았다. 장마나 태풍에 쓰러질까 대비해 놓은 듯 보였다. 이 소나무 군락지가 보이면 매봉에 근접한 것이다. 두 번의 계단 오르막을 지나 드디어 매봉! 4300보.
어라, 매봉이 이리 가까웠던가? 예전엔 분명 아픈 다리를 끌고 패잔병처럼 간신히 올라왔는데? 이럴 수가, 20개월째 매일 만 보를 걸었더니 매봉이 쉬워졌다! 체감상 거리가 절반은 줄어들었나. 그 매봉이 이 매봉이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벤치에 배낭을 벗어놓고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산줄기에 늘어선 송전탑만 아니라면 더욱 근사할 텐데. 하얀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간간이 나타났다.
푸른 녹지로 둘러싸인 문원동과 대공원 호수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1980년대 그야말로 촌이었던 과천에 정부청사가 들어오고 주공아파트를 세우면서 계획도시를 만들었다. 과천 원주민 중 일부가 밀려난 동네가 지금의 문원동이다. 조금 큰 동네가 문원 2단지고 왼쪽 위의 자그마한 동네가 문원 1단지. 주택가임에도 1단지, 2단지라고 불렀던 것은 아파트와 대응해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비록 낡은 주택가지만 아파트 단지에 지기 싫다는 의지랄까.
현재는 시에서 ‘공원 마을(구 문원 1단지)’, ‘문원 청계마을(구 문원 2단지)’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원주민들은 여전히 옛 이름으로 지칭하지만 말이다. 구 주공아파트들이 대부분 재건축되어 으리번쩍한 고층 아파트로 변신한 지금, 여전히 산 아래 문원동은 시내보다 뒤떨어진 동네가 맞다. 그러나 역세권보다 숲세권을 사랑하는 나는 우리 동네가 좋기만 한 걸.
녹지 너머로 새 아파트들이 병풍처럼 늘어섰다. 매봉에선 과천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오르는 동안 땀을 흘렸는데 잠시 쉬는 사이에 상황은 역전되었다. 땀이 식자 으스스 몸이 떨렸다. 바람막이를 꺼내 젖은 티셔츠 위에 입고 지퍼를 단단히 채웠다. 땀 냄새가 배겠지만 어쩔 수 없네.
이젠 돌아갈 시간. 올라왔던 계단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내려간다. 나무 그늘 아래 탁자를 놓고 막걸리를 파는 아저씨를 만났다. 해마다 그 자리에서 장사하는 분인데 여전하구나. 코로나 시국에 이래도 되나(산속이라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까)? 감히 나무랄 수는 없고 못 본 척 지나쳤다. 또 만난 갈림길. 5300보. 오랜만에 왔더니 팻말이 바뀌었다. ‘의왕대간 등산로 안내도’라고 적혀 있다. 능선을 타고 직진하면 청계사, 왼쪽으로 내려가면 뱅뱅 돌아가는 오솔길.
여기부터 직진 인생을 뒤로하고 샛길 인생으로 갈아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간이다. 낮고 좁은 산길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조용하고 아늑했다. 여름내 자란 풀들이 무릎까지 무성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길이 더 좁아졌네. 아우성치는 풀줄기가 놀다 가라고 발목을 잡는 것 같았다. 바람이 잠잠했다. 언제 추웠냐는 듯 금방 열이 올랐다. 사우나도 아니고 이 몸은 온탕 냉탕에다 급탕까지 가능한겨? 바람막이를 벗어 배낭에 쑤셔 넣었다. 15분이나 입었을까?
첫 번째 오솔길을 빠져나오자 아까 물을 마셨던 쉼터가 코앞이었다. 6400보. 나와는 반대로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젊은 가족과 마주쳤다. 아들, 딸, 엄마, 아빠. 네 명은 헉헉거리며 벤치에 앉았다. 아빠가 말했다. “아무래도 애한테 긴 바지를 입혀야 했어. 너 춥니?” 아들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이어서 엄마가 말했다. “에구, 나 끝까지 갈 수 있을까? 힘들다.” 다시 아빠가 말했다. “아들, 엄마한테 할 수 있다고 얘기해줘!” 어린 아들이 외쳤다. “엄마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탁구공처럼 이어지는 대화가 재밌다. 그래요, 매봉까지 갈 수 있을 거예요. 얼마 안 남았거든요, 힘을 내세요.
다시 소나무 군락지에 도착했다. 아까 지나왔던 비탈길 소나무 말이다. 여기서 자칫하면 코스를 벗어날 수 있다. 언젠가 남편과 함께 왔을 때, 오른쪽 샛길을 못 보고 지나쳐버렸다. 떠들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분명 옆길로 빠지려고 했는데, 여긴 언제 온 걸까? 그날 종아리엔 어김없이 알이 배겼다. 오늘은 제대로 가보자.
돌아가는 오솔길 두 번째 구간엔 밤송이가 발길에 차였다. 이미 떨어진 지 오래되어 알맹이는 사라지고 가시만 남은 껍데기들. 주변엔 벌레 먹은 잎사귀들이 가득했다. 구멍이 숭숭 뚫려 얇고 초라했다.
앗 누리장나무다! 9월부터 맺히는 열매가 참 예뻐서 내가 좋아한다. 진한 분홍색 받침에 짙은 파란색 열매가 독특하기 짝이 없다. 유난히 튀는 색깔이라 찾기도 쉽다. 아뿔싸, 반 정도는 받침이 누렇게 말라 버렸다. 철이 지났네. 쓸모를 다 하고 버려진 것들 특유의 냄새가 풍겼다. 자부심과 쓸쓸함이 묘하게 뒤섞인 향기랄까.
머리 위에서 까마귀가 까악 까악 울었다. 언제부터인가 산에 까마귀 수가 크게 늘었다. 까치의 영역을 까마귀가 차지한 걸까? 사람들이 미처 주워가지 못한 알밤이 가끔 굴러다니고 그 사이로 도토리가 툭툭 떨어졌다. 쓰르르 쓰르르. 10월인데 아직도 매미가 있구나. 나 같은 늦둥이 인생이로세. 매미는 ‘내 인생, 아직 늦지 않았다!’ 그렇게 외치고 있는 듯했다. 동감이다, 매미야.
돌아가는 오솔길 세 번째 구간은 약수터 두 개를 거친다. ‘매봉 2 약수터’에 도달하니 7700보. 거기서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에 ‘매봉 1 약수터’가 자리했다. 벌써 11시가 되었다. 무리 진 등산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가 저절로 들려왔다. 나이 든 여자들은 자신만의 특제 요리법을 설명하느라 바빴고 나이 든 남자들은 정치를 논하느라 침이 튀었다. 젊은 엄마들은 아이들 육아와 교육에 대해 고민했다. 무리마다 주제가 뚜렷해서 지나가는 과객은 속으로 웃었다.
“모두가 내리시는 곳입니다. 손잡이를 당기세요.” 희미하게 이 소리가 들리면 서울대공원과 문원동으로 나뉘는 갈림길에 도달한 것이다. 서울대공원의 리프트 매표소에서 틀어놓는 안내방송이 이곳까지 울린다, 딱 10000보. 실질적인 등산 끝. 집까지는 누워서 떡 먹기, 11000보. 아 오늘도 개운하게 잘 걸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