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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길 3번, 동물원 둘레길

우리 동네에서 매일 걷는

by 소율

3. 동물원 둘레길


좌숲우숲, 동물원 둘레길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단어. 부연 설명하자면 왼쪽은 동물원의 울창한 나무들 오른쪽은 우거진 청계산, 뜨거운 햇빛이 가려지는 완벽에 가까운 숲 터널, 총 4.5km. 이름 그대로 서울대공원 동물원을 중심에 두고 가장자리로 한 바퀴 도는 길이다. 도로포장이 되어있어 누구라도 쉽게 걸을 수 있고, 비 오는 날이라도 까딱없다.


예전에는 동물원 둘레길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대공원 산림욕장으로 오고 가는 통로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산림욕장이 주연이라면 동물원 둘레길은 조연인 셈이다. 산림욕장은 7km가 넘는 산길이라 등산에 가깝다. 전 구간을 걷기가 힘들면 중간에 있는 남미관 샛길, 저수지 샛길, 맹수사 샛길, 세 군데의 샛길로 빠져나갈 수 있다. 이때 아래에 있는 동물원 둘레길과 만나는 것이다.


단점은 동물원 입장권을 사야만 산림욕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 그러니 곁다리 동물원 둘레길을 걷자고 입장료 오천 원을 낼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알음알음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는 풍문이 돌았고, 서울시가 선정한 아름다운 단풍길 노선 중 하나라고 한다.


동물원 둘레길의 위상이 올라가고 문턱이 낮아진 것은 코로나 덕분이었다. 2021년 1월부터 무료 개방을 시작한 것이다. 코로나가 시작된 2020년, 동물원을 비롯한 서울대공원 전체 방문객이 줄어들자 고심 끝에 내놓은 유인책인 듯싶다. 이유야 어떻든 누군지 모를 관계자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덕분에 사랑하는 숲길을 마음껏 걸을 수 있다오.



들어가는 입구는 두 곳인데 이전처럼 동물원 정문을 거치지 않아 한결 편해졌다. ‘대공원 뒷길’의 동물병원 쪽 초소 입구와 동물원 북문 근처 쪽 입구. 전자에서 후자 방향으로 걸으라고 화살표가 그려져 있지만 사실 어느 쪽에서 시작해도 상관없다. 이건 비밀인데 역방향이 더 좋다. 문 여는 시간에 맞춰 들어가면 숲길을 전세 낸 듯 혼자 걸을 수 있으니까. 순방향보다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재벌이 아니더라도 숲길을 통째로 전세가 가능한 곳이라고나 할까. 북적대는 길에서 사람들 등짝만 보며 걷는 건, 맛도 멋도 안 나지 않는가.



아직 매력이 소문나지 않아서 길은 한산한 편이다. 아는 사람만 아는 숨은 명소라 할 수 있다. 동네 주민으로서는 보석 같은 코스가 아닐 수 없다. 9시에 개방하므로 나는 평소보다 늦은 8시 45분쯤 집에서 출발한다. 길은 숲에 둘러싸여 고즈넉하다. 지저귀는 새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쪼르르 청설모가 달려간다.


산림욕장과 동물원 둘레길이 갈라지는 분기점은 공용화장실이다. 화장실 뒤 계단으로 올라가면 산림욕장, 이 지점에서 등산객이 빠지기 때문에 더욱 한적해진다. 2400보. 혹시 오래된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을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심은하 주연의 잔잔한 이야기. 이 길에서 그 영화를 찍었단다. 영화 촬영 기념 팻말에 ‘1998. 12. 19 개봉’이라고 적혀 있다. 벌써 20년이 넘었네. 3800보.


오른쪽 청계산에서 내려온 계곡물 끝자락이 드문드문 바위 사이로 보인다. 좌숲우숲 더하기 가끔 계곡. 숲 터널을 실컷 걸어보고 싶다면 이곳으로 오시라. 비 온 뒤라 바람이 차고 시원해 '힐링 로드‘ 그 자체로다. 양옆의 키 큰 나무들이 공중에서 만나 가지를 뻗었다. 고개를 젖히면 온통 초록이 하늘을 덮었다. 그늘 바라기 나에게 이처럼 취향 저격일 수가. 알록달록한 무지개다리에 도착하면 대략 절반 지점. 5500보. 마침 벤치도 있고 이쯤에서 쉬었다 가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하지만 오 분만 참으시길. 무지개다리를 건너자마자 저수지 샛길 오르막이 나타난다. 이 순간이 매우 중요하다. 오르막이라고 포기하면 안 된다. 꼭 이 길로 빠져야 할 이유가 있다. 바로 서울대공원의 최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광 때문이다. 길을 오르면 '대공원 숲 속 저수지'가 등장한다. 주변 산세에 폭 쌓인 저수지는 한 폭의 그림 같다. 뒤로는 청계산이 앞으로는 관악산이 겹겹이 펼쳐진다. 청계산과 관악산을 동시에 전망할 수 있는 명당, 나는 이곳을 동물원 둘레길의 하이라이트라 부른다.


여기서 산세만 구경하고 내려가면 섭섭하지. 원 플러스 원. 또 하나의 즐거움이 기다리니까. 저수지 둘레를 따라 도는 오솔길을 마저 걸어야 한다. 둘레길 속의 둘레길이랄까. ‘대공원 숲 속 저수지’란 밋밋한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물빛이 예술이다. 산자락 푸른빛이 물에 비쳐 에메랄드빛이 난다. 청계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저수지로 모여 유달리 깨끗하다.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면 동남아시아 해변이냐고 물을 정도!


5월엔 샛노란 황매가 가득하더니 지금은 초록색 루모라 고사리가 소복이 자랐다. 오솔길 중간쯤 쉼터의 벤치에서 에메랄드빛 물결을 감상하며 잠시 쉰다. 6500보. 오솔길을 마저 돌아 다시 무지개다리로 내려간다. 이후 맹수사 샛길을 지나 리프트 그물 아래를 걸어서 길 끝이자 동물원 북문 쪽 입구에 도착한다. 10300보. 집으로 돌아가니 13000보. 걷기는 좋아하지만 등산은 벅찬 당신에게 맞춤한 코스, 동물원 둘레길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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