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자마자 주방의 찬장부터 열었다. 오늘은 별러왔던 ‘그것’을 해 보리라. 어제 배송된 코스타리카 따라주 산 커피 원두를 꺼냈다. 봉지에서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몇 스푼 떠서 그라인더에 갈았다. 향기는 더욱 진해졌다.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원두 가루를 종이 여과지에 털어 넣었다. 진하게 핸드드립으로 내리고 뜨거운 물을 조금 더 부었다. 작은 보온병에 커피를 담아 야무지게 뚜껑을 닫았다. 오호라 들뜨는 기분이다. 냉동실에서 미리 꺼내놓은 통밀빵 두 쪽을 납작한 락앤락에 넣고 따로 물병에 물을 채웠다. 일단 먹을 것 준비는 완료. 요즘 읽는 책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을 배낭에 넣고 형광펜도 하나 챙겼다. 마지막으로 모자와 마스크를 썼다. ‘그것’을 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대공원 뒷길 호수에 딱 붙은 ‘호숫가 전망 좋은 길’. 먼저 평소처럼 대공원 호수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았다. 걸을 건 걷고 나서 본론을 시작해야지. 동물병원 맞은편에 호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이 길이 최근에 조성된 ‘호숫가 전망 좋은 길.’ 굽은 소나무와 쭉쭉 뻗은 메타세쿼이아가 사이좋게 서 있다. 테이블이 달린 벤치가 띄엄띄엄 놓여있다. 여기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게 나의 소박한 로망, 바로 ‘그것’이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명당인데 10시만 넘어도 자리가 없다. 7시 50분. 아무도 없었다. 단 한 명도. 우와, 맘대로 골라 앉아도 되겠네! 나는 바람이 잘 통하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곤 배낭에서 먹을 것과 책을 꺼냈다. 담백한 통밀빵을 씹으며 손수 내린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란! 아직도 따끈했다. 캬, 이 맛이지.
어디선가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왔다. 아마 빵 냄새를 맡은 모양이다. 요즘 돌아다니는 까치들은 ‘중까치’다. 즉 완전히 자란 성체도 아니고 아직 어린 새끼도 아닌 어중간한 크기의 녀석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청소년 까치’라고나 할까? 그 나이대 인간들이 그렇듯이 얘네들도 몰려다닌다. 곧 마릿수가 불어났다. 어느새 세 마리, 네 마리. 코앞의 호수 울타리에 앉아 관심 없는 척 시선을 돌리며 군침을 흘렸다. 평소에는 땅콩을 가지고 다니는데 하필 오늘은 두고 나왔다. 참새나 박새 정도라면 빵부스러기를 줄 텐데 까치들은 (청소년이라고 해도) 좀 크다. 저 단단한 부리로 몰려들면 곤란하다. 나는 끝내 녀석들을 외면하고 빵을 먹어치웠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책갈피를 꽂아 놓았던 부분을 폈다.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은 소설가 배수아가 몽골의 알타이 지역을 여행한 후 쓴 책이다. 그녀는 알타이의 메마르고 비현실적인 풍광에 놀라고 있었다. 바람은 살랑 불고 호수의 물결은 일렁이고 나는 작가와 함께 알타이를 걷는다. 바람대로 완벽한 독서 시간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서 책을 떼게 하는 소리가 자꾸 들려왔다. 국구 국구구 리듬 맞춰 우는 산비둘기 소리, 두서없이 깍깍대는 까치 소리, 오리가 꽉꽉 거리는 소리, 멀리서 물개가 엉엉거리는 소리, 들개처럼 우우우 하울링을 하는 개들 소리. (아니 저런 개 소리는 도대체 어디서 나는 거래?) 동물원 근처 아니랄까 봐 온갖 동물 소리가 잘도 들렸다.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달랬다. 내 로망이었잖아. 자, 책을 보자구. 이번엔 호수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날아가는 커다란 흰 새 한 마리가 눈길을 끌었다. 왜가리인가?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갑자기 바로 옆에서 사사삭 하는 소리가 났다. 무심코 바라보니 어머나! 잿빛 아기 오리들이 줄을 지어 뒤뚱뒤뚱 풀숲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림책을 삼차원으로 보는 느낌이랄까. 책에서만 그런 줄 알았는데 실제로 오리들은 세상 귀엽게 줄을 맞춰 걷는구나. 부리나케 핸드폰을 카메라를 켜며 일어서다가 벤치에 다리를 콱 찧었다. 아얏. 아냐, 오리가 먼저야. 그러나 얼마나 재빠른지 오리들은 벌써 호숫가에 다다랐다. 사진 찍어봐야 멀어서 알아볼 수가 없겠다.
나는 사진은 포기하고 얼른 머릿수를 세었다. 어미 한 마리에 새끼가 여덟 마리. 합이 아홉 마리였다. 너무 귀여워서 온몸의 솜털이 일어서는 느낌이었다. 녀석들은 또 줄을 지어 물로 퐁퐁 들어갔다. 그 후로도 테이블 위로 날개 달린 개미와 앞발 두 개를 더듬이처럼 움직이며 살금살금 파리가 기어 다녔다. 알타이, 나는 지금 알타이에 있어야 한다고! 그러나 나는 호숫가에 있을 뿐이었다.
친구로 보이는 두 명의 여인이 옆 벤치에서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갔다. 저쪽에서는 부부임이 분명한 중년 남녀가 조그맣게 대화를 나누며 걸어왔다. 책은 불과 몇 장밖에 읽지 못했는데 8시 50분. 나무 그늘 아래 앉아있으니 땀이 식다 못해 싸늘해졌다. 이럴 줄 알고 가져온 여름용 카디건을 걸쳤으나. 너무 얇았나 보다. 여전히 으슬으슬했다. 기온은 21도. 추울 정도는 아닌데 응달에 오래 앉아있어 체온이 떨어지는가 보이.
나는 그쯤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도서관에도 들렀다가 늦어도 10시까지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남아있던 커피 세 모금을 마셨다. 여전히 뜨끈했다. 손목에 차고 있는 스마트밴드엔 팔천 보가 찍혀 있었다. 도서관을 거쳐 집에 가면 딱 만 보가 되겠군. 책에 집중하지는 못했지만, 불만은 없었다. 책이야 집에 가서 또 읽으면 되지. ‘어쨌든 오늘 로망을 실현했노라.’ 나는 씽긋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