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무엇을 채우고 싶은가? 나는 ‘우리 동네’라 써넣는다. 내가 현재 발 딛고 사는 곳. 저기 말고 바로 여기, 지금 여기. 매일 걷기는 화려한 이벤트가 아니다. 무채색 일상이며 조용한 습관이다. 나는 일찍이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에 합류할 자신이 없어서 오랫동안 무면허와 장롱면허를 유지했다(창피하다, 자랑이 아니다). 불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덕분에 동네 구석구석을 몸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발자국을 진하게 남긴 장소와 눈길로 스쳐 간 장소는 감각의 밀도가 완전히 다르다. 걸을 때라야 우리는 공간을 신체에 새겨 넣는다.
자, 매일 걷기를 위해 첫 번째 할 일은 집을 나섬과 동시에 자동으로 향할 수 있는 장소를 몇 군데 물색하는 것이다. 먼 곳이 아니라 여러분이 사는 동네에서 말이다. ‘과천은 워낙 걷기 좋은 도시니까요, 하지만 우리 동네는 걸을 데가 없거든요.’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요즘 길들을 지나치게(?) 잘 조성해 놓았다. 어느 도시건 어느 동네건 이름 붙인 ‘무슨무슨 길’이 넘쳐난다. 제주 올레의 성공 이후 지자체마다 걷는 길 만들기가 유행처럼 번진 결과였다. 강변, 개천 길, 공원길, 약수터길, 낮은 뒷산이 없는 동네는 없을 터이다.
다음의 네 개 코스는 내가 매일 걷는 단골 길이다. '서울대공원 호숫가 둘레길, 호숫가 전망 좋은 길, 동물원 둘레길, 청계산 매봉.'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겠는데, 과천에는 과천대공원이 아니라 서울대공원이 자리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서울시에서 관리한다. 일산의 호수공원 이름이 '일산 호수공원'이 아니라 '서울 호수공원'인 격이라면 이해가 될까?
나의 단골 길 중 무려 세 곳이 서울대공원에 속한다. 심지어 청계산 역시 대공원과 연결되어 있다. 정확하게는 청계산 끝자락에 서울대공원을 지은 것이다. 과천주민과 서울대공원이 찰떡같은 관계임을 눈치채셨나요? 대공원은 시민들의 안락한 휴식처이자 동네 공원 역할을 한 지 오래다. 벚꽃철과 단풍철에 수많은 관람객이 서울대공원을 찾아오지만 일년내내 대공원을 차지하는 진정한 주인은 다름아닌 동네 주민인 셈이다.
나는 시간이나 기분, 상황에 따라 네 코스 중 하나를 걷는다. 청계산 매봉은 등산에 해당하므로 자주 가진 않는다. 여유 있는 주말에 가끔 올라간다. 걷기보다 힘들기도 하고, 왕복 두세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아침 운동은 길어도 1시간 언저리에서 마무리하고 싶다. 오전 내내 운동에만 에너지를 쏟으면 다른 일은 어떻게 하냐고. 질량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나에게도 통한다. 고도의 기술인 '균형 잡기'가 절실하다.
1. 서울대공원 호숫가 둘레길
7시. 알람이 울린다. 커튼을 열어 창문 너머를 살펴본다. 약간 흐린 하늘과 듬성듬성한 구름. 핸드폰을 눌러 기온을 확인하니 20도. 선선하고 구름 낀 날씨. 걷기엔 딱 좋겠네.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고 싶지만 마음과 달리 몸이 침대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속으로 ‘오 분만’을 외친다. 엎어져 있다가 누웠다가 눈을 감는다. 잔뜩 뜸을 들이다 결국 몸을 일으킨다. 단숨에 일어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
어물거린 탓에 집을 나서는 시간은 7시 20분이나 30분. 언제나처럼 문원도서관 옆 골목을 지나 도로를 건너 청계산 등산로 입구로 올라간다. 700보. 위아래로는 청계산 매봉으로 가는 능선, 건너질러 가는 오솔길은 서울대공원으로 넘어가는 통로. 나는 항상 이 짧은 산길을 넘어 일명 ‘대공원 뒷길’로 들어선다. 스카이 리프트 매표소 뒤쪽의 야구장부터 동물병원까지 이어지는 한적한 길이다. 딱히 이름이 있는 게 아니라서 편하게 부르다 보니 ‘대공원 뒷길’이 되었다. 방문객들이 모여드는 주차장이나 서울 대공원역(4호선)에서는 이 길이 보이지 않아 약간 숨겨진 느낌이다. 문원동 쪽 등산로와 이어지기 때문에 거의 동네 사람들만 이용한다. 다시 말해 동네 주민이 아니면 잘 모르는 뒷길이라 할 수 있다.
산을 빠져나와 대공원 뒷길로 들어서서 동물병원까지 걸어간다. 이 지점에서 선택지는 두 가지. 직진하여 동물원 둘레길을 가던가 왼쪽으로 꺾어 호수를 중심으로 크게 돌던가. 어차피 이 시간에 동물원 둘레길은 갈 수 없다. 9시부터 문을 여니까. 나는 자연스레 대공원 호수 둘레길로 향한다. 여기까지 1800보. 곧 동물원 정문이 보인다. 몇 달 동안 공사 중이더니 드디어 마무리되나 보다. 둘러쳤던 천막 가리개는 치웠고 이미 입구의 반을 사용하고 있다. 머지않아 새로 단장한 동물원 정문 전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앗, 동물원과 마주 보는 테마가든 울타리가 온통 분홍분홍 눈길을 끈다. 올망졸망 화사하고 탐스러운 꽃송이가 울타리를 가득 뒤덮었다. 잎사귀보다 꽃이 더 많아! 갑자기 주위가 동화 나라로 바뀐 것 같다. 꺅, 사랑스러워라. 장미랑 비슷한데 무슨 꽃일까? 핸드폰을 꺼내 든다. 아침 운동에 핸드폰이 필요한 이유. 예고 없이 멋진 풍경을 만나면 사진을 남기기 위해서, 모르는 꽃과 풀이 보이면 그 자리에서 알아보려고. 이름이 궁금한 식물은 네이버의 렌즈 기능으로 찰칵찰칵 물어본다. 네이버 님이 대답하시길 명자나무 꽃이란다. 세상에 장미꽃이 울고 가겠네. 현빈으로 빙의해 물어보고 싶다. “명자 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나?” 내게 정원이 생긴다면 꼭 명자나무를 심으리라. 한참 사진을 찍고 향기를 맡는다. 오늘치 행운은 여기서 다 받는군.
오전엔 테마가든 쪽보다 코끼리 열차가 다니는 중앙 도로의 오른편 인도에 그늘이 진다. 나는 해바라기가 아니라 그늘 바라기. 선크림은 끈적거려 바르기 싫고 모자를 쓰면 답답하다. 햇빛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는 단순하다. 오직 그늘을 사수하라! 꽃잔치를 끝내고 길을 건넌다. 훨씬 시원하다. 호수 둘레에는 오래된 벚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창경원 시절의 벚나무를 옮겨와 아름드리나무가 즐비하다. 4월엔 벚꽃 터널로 변신하여 누구라도 흩날리는 꽃비 속 영화 주인공으로 만들어준다.
아침 걷기는 운동과 산책의 중간이랄까. 굳이 따진다면 산책 쪽에 10%쯤 가깝다. 천천히 걸으며 몸과 마음을 깨우는 일. 중간중간 물을 마시며 잠깐 벤치에 앉았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편하게 마스크를 벗는다. 이른 아침의 산책이 좋은 이유를 들자면 다섯 손가락을 꽉 채운다. 마스크를 벗고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것, 호젓하게 혼자서 걸을 수 있는 것, 그래서 한결 마음이 차분히 정리되는 것, 고요해서 새소리가 잘 들리는 것, 아침의 정취에 흠뻑 빠지는 것......
다시 길을 걷는다. 다리를 건너 서울랜드 정문에 이른다. 3200보. 코끼리 열차가 다니는 차도는 길 위쪽으로 빠져 매표소로 이어진다. 예전엔 코끼리 열차 매표소 아래에 분수가 있었다. 가끔 대공원을 찾아오는 친구들과 “분수 앞에서 만나자.” 약속했었지. 지금은 분수가 없어지고 넓은 잔디밭 광장이 되었다. 대공원 지도가 자꾸 바뀐다. 잔디밭에 연두와 초록이 물결치듯 번갈아 피어있네. 꽃만큼 어여쁘다.
편의점과 카페가 붙어 있는 스카이 리프트 매표소에 이르면 얼추 호수를 한 바퀴 돈 것이다. 4900보. (여유가 있다면 호수를 한 바퀴 더 돌 수도 있다). 보통은 그쯤에서 야구장 쪽 뒷길을 올라 청계산 등산로 입구로 향한다. 처음 지나온 그곳이다. 다시 산길을 넘어 동네로 내려간다. 집까지 돌아가면 7200보. 땀에 젖은 옷을 벗고 샤워할 때 개운한 이 맛, 오늘도 상큼하게 하루를 시작했구나. 그러고 나면 기분 좋게 아침을 먹는다. 원두커피 한 잔에 통밀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 가벼운 산책과 가벼운 아침밥, 매일의 루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