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매일만보

여행작가의 걷기

by 소율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여행작가입니다.”라고 답하면 상대방의 머릿속에 그림이 쫙 펼쳐진다. 일 년 내내 외국 어딘가를 돌아다니는 자유로운 영혼. 어디에서나 잘 자고 아무거나 잘 먹고 커다란 배낭을 메고 하루 종일 걸어도 끄떡없는 마녀 체력의 소유자. 여행만 해도 좋은데 돈까지 벌다니 이것은 꿈의 직업? 환상적인 이미지의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가이드북을 집필하거나 주로 취재 위주의 기사를 쓰는 분들, 특히 싱글이라면 해외 체류가 잦거나 기간도 길 수 있다. 물론 에세이를 쓰는 작가 중에도 장기간 여행을 하는 분들이 있고말고. 그러나 같은 색깔로 뭉뚱그려 몰아넣기에는 워낙 다양한 여행작가들이 존재한다. 해외보다 국내를 전문으로 하는 여행작가가 훨씬 많다(고 알고 있다). 즉 백인백색.


나는 여행작가의 이미지에서 한참 벗어난 사람이다. 이미 경력이 오랜 작가들처럼 이삼십 대에 여행을 시작하지 않았다. 마흔 이전에는 어떤 이유로든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첫 책을 마흔일곱 살에 출간했다. 책이 나와야 공식적인 작가이므로 나는 마흔 후반에 여행작가라는 명함을 얻은 것이다. 마흔부터 여행을 시작해서 해마다 여행을 떠나기는 하지만 (예외로 여러 번 나갔던 어느 해만 제외하고) 일 년에 한(두) 번 정도가 고작이다. 여행 기간이 한두 달 가량 다소 긴 점만 빼면 여행을 좋아하는 일반인과 별다를 것이 없구려.


여행을 가지 않는 열 달 동안은 무얼 하냐고? 주로 인터넷 상의 블로그, 브런치와 카페를 관리하고 강소율여행연구소의 강의들과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한다. 도서관, 복지관 등에서 요청이 들어오면 여행 강의를 준비하고 특강을 나가기도 한다. 천운이 따라주어 출판사와 계약이 이루어지면 원고 작업을 한다. 해마다 다니는 여행이 매번 책으로 탄생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실제로는 매우 드물게 출산(출간)이 이루어진다.


현재 출간된 여행책이 두 권, (코로나로 인해 출간이 미뤄졌지만) 작업이 끝나 출간 예정인 책이 한 권 있다. 이 걷기 에세이가 순조롭게 출간된다면 네 번째 책이 되겠다. 사족을 붙이자면 26년째 현재 진행 중인 주부. 버튼만 누르면 최소 오 첩 반상이 차려지거나 빨래가 스스로 세탁기로 걸어 들어가고 튀어나오지 않는 한 미래 진행형 추가요. 일에 집중하면서 살림의 중요도가 현저하게 떨어지긴 했다.


체력에 대한 추측 역시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잘 먹는다는 점 외에 나머지는 글쎄올시다. 앞에서 밝혔듯 유방암 환자 출신이라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체력이 떨어진다. 꼭 병 때문만은 아닌 것이 타고나길 튼튼하지 못해서 어릴 때부터 자주 골골거리는 편이었다. 이젠 병력에 나이까지 먹어가니 오히려 평균 이하에 속하지 않을까. 가끔 연구소에서 함께 걷는 모임을 진행할 때, “여러분 중에서 제가 체력이 가장 약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천천히 즐기며 걸어요.”라고 하면 다들 놀란다. 그리고 이내 안심한다. 저이도 우리처럼 평범하구나, 하고.


몇 년 전부터 지자체마다 둘레길이 활성화되고 걷기 붐이 일면서 숨은 고수들이 등장했다. 북한산 둘레길, 서울 둘레길, 서울 성곽길 등 수도권을 비롯해 제주올레, 해파랑길, 지리산 둘레길 등 전국의 걷기 좋은 길을 찾아 ‘도장 깨기’ 하는 마니아층이 바로 그들이다. 가끔 그분들을 만나면 나 따위는 아주 겸손해진다. 익을수록 고개 숙이는 벼가 아니라 덜 익은 제 주제를 아는 한 떨기 잡초가 된다.


이쯤에서 여행작가에 대한 환상을 와장창 깨뜨린 점에 대해 죄송할 따름이다. 단지 ‘소율’이라는 훌륭하지 못한 사람에 한정된 이야기라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이 글이 ‘저질 체력으로 태어나 어떻게 강철 체력으로 거듭났는가’ 하는 성공 스토리는 되지 못하지만 ‘저질 체력으로 태어났지만,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 조금씩 자신을 키워나가는’ 성장 스토리로 봐주신다면 정확하다. 뭐야, 이쯤은 나도 할 수 있겠네,라고 하시면 음흉한 내 의도에 퐁당 빠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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