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던 일을 반드시 이루어야 할까? 이루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괜찮다. 오십 중반에 이르러 드는 생각이다. 이룰 수 있는 일도 있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있다. 이룬다고 꼭 행복한 것만도 아니고 이루지 못했다고 불행한 것만도 아니다. 제주도에서 1년 사계절을 오롯이 살아보고 싶은 꿈이 있었다. 몇 년도에 기필코 하리라, 결심하진 않았다. 일명 '막연한 꿈' 그 자체였다. 뭐 언젠가는 정도.
'언젠가'에 '구체적인 시기'를 부여한 건 내가 아니라 '코로나 그 넘'이었다. 내년 2022년도까진 개인적인 해외여행의 안전성이 확실치 않은, 이때가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애매할 때 확실한 무엇이 될 수 있었다, 제주도 1년 살이란.
나라고 왜 걱정이 없었을까. 7년간 떨어져 살았던 아들과 같이 지내는 상황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세 식구가 모여 사는데 굳이 엄마가 1년씩이나 집을 비운다니. 이래도 되나. 남편의 눈치도 안 볼 수 없었다. 말로는 가라고 하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면 정말 괜찮아할지. 이중으로 드는 생활비는 감당할 만할까.
살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지 오래라지만 그래도 때맞춰 생필품을 채워 넣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을 챙기는 가사 역시 다 내 몫이었다. 두 남자가 과연 집안을 쓰레기통으로 만들지 않고 사람답게 지낼 수 있을까. 욕실이 곰팡이 밭이 되진 않을까(이건 전례가 있어 더욱 불안하다).
대학을 가기 전까진 제법 깔끔하고 야무졌던 아들이 이제는 달라졌어요. 직장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사실 핑계라 몰아붙이기엔 심하게 바쁘긴 하다) 아빠와 비슷해져 가고 있다(결국 아들은 아빠를 닮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잠시 한탄 한 번 하고 넘어가련다). 집안일에 나 몰라라,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이런 느낌.
일단 보름살이를 시도하기로 했다. 처음엔 한 달 살이를 하고 나서 결정하려고 했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그동안 수없이 제주도를 경험했는데 한 달씩이나 확인이 필요하겠나 싶은 거다. 기간을 보름으로 줄였다. 1주일 정도는 주민 코스프레를 하다가 마음을 확정한 뒤, 나머지 1주일은 적당한 집을 얻으면 되겠다.
깨지라고 있는 것이 계획이란 듯, 역시나 보름의 일정이 마음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보름을 살 숙소를 고르기가 귀찮아서, 그래 결정적으로 귀찮았다. 예전엔 정말 꼼꼼하게 숙소를 따졌는데 성격이 느슨해졌나 보이. 대충 조용한 동네에 답답하지 않을 만큼의 공간을 가진 원룸 펜션. 책상(이나 식탁) 필수. 제주도 중앙에서 가까운 곳. 그래야 동서남북으로 집을 보러 다닐 때 이동이 효율적이니까.
그 정도만으로 고른 숙소는 단 하나의 단점이 있었다. 여행이 아닌 생활을 경험하기엔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동네였던 것이다. 걸어서 갈 수 있는 범위 안에 생활 편의 시설이 전혀 없었다. 그 흔한 편의점 하나도.
간단한 밥 한 끼를 먹으려면 차를 몰고 나가야 했다. 5분~10분가량이니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수 있었다. 그러나 늘 걸어서 생활하던 나에게 매번 운전하고 주차하는 과정은 시간에 상관없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편세권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로군.
또한 느긋하게 온갖 종류의 집을 보고 고민한 뒤 신중하게 집을 구하려고 했으나.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공인중개사들 말로는 올해 초만 해도 하루에 열다섯 개씩 쏟아지던 1년 살이 물량이 지금은 한두 개 간신히 나온단다. 백신 접종을 모두 마친 뒤 엄청나게 많은 수도권 사람들이 제주로 온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그중의 한 명이었네.
집을 본 지 4일 만에 연세 계약을 했다.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의 방 2개짜리 타운하우스다. 무작정 기다린다고 더 좋은 집을 찾기는 어렵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조금만 그럴듯해 보이는 집도 내놓은 날 바로 계약이 되는 상황이었으니. 이것저것 재다가는 보름 안에 집을 구하지 못할 판이었다. 결국 원래 마음먹었던 조건을 대폭 포기했다. 편세권은커녕 마을과 차로 15분 떨어진 외진 곳이다. 생활권은 인근의 세화리.
내가 원했던 집의 조건은 이랬다. 마을 안에 있거나 마을과 가까운 곳. 걸어서 산책하거나 편의 시설에 갈 수 있는 곳. 위층 소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독립적인 구조. 도로와 떨어져 있어 차 소음이 없는 곳. 당연 비행기 소음도 없는 곳. 그리고 방 2개짜리 풀옵션.
마을과의 편의성은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했다. 풀옵션도 지킬 수 없었다. 조용함과 독립성은 얻었다. 무엇보다 집 자체의 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탁 트인 주방과 거실. 거실 밖으로 잔디밭 비스름한 것도 있고.
풀옵션은 아니지만 반 옵션이라 해야 할까. 냉장고, 세탁기, 식탁, 에어컨, 제습기가 구비되어 있다. 침대와 붙박이장이 아쉽지만 해결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까. 타운하우스 전체가 단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변은 들판 같은 임야로 둘러싸였다. 밭이라면 농약을 칠 때마다 바람에 날아온다는데 그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이 집을 보자마자 즉시 결정하고 계약금을 넣었다. 내 뒤에 바로 집을 보러 온 사람이 또 있었는데 그녀도 집을 마음에 들어 했다. 5분 전에 내가 계약한 걸 알고는 무척 아쉬워하며 돌아갔다오. 뭐 이런 사정이다. 잠깐 망설이면 다른 이가 채어간다네.
나는 겨울이 지나고 3월에 입주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집주인은 공실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타협을 본 것이 12월 15일. 느긋하게 생각했는데 한 달 뒤로 이주를 하게 생겼다. 계약을 한 뒤 긴장이 풀렸는지, 안 하던 운전을 너무 많이 했는지, 몸살이 나버렸다. 4일을 원룸에서 앓고 돌아왔다. 여전히 피곤해서 일주일은 암것도 안 하고 쉬었다. 드디어 충전 배터리 완료.
며칠 전부터 정신을 차리고 가져갈 물건들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풀옵션이 아니기에 챙겨야 할 것들이 아주 많다. 여기서는 누워서 떡 먹기인 인터넷 쇼핑도 제주에선 만만치 않단다. 일단 배송비가 비싸고 시간이 오래 걸린단다. 몇 천 원짜리 물건을 사자고 배송비를 물건값보다 더 지불하는 식이다. 인터넷으로 살 수 있는 자잘한 것들은 미리 사놓아야 한단 말씀이여. 생협에서 구입하던 화장품이나 마스코바도 같은 것도 넉넉히 챙겨놔야 하고요. 제주에도 매장이 있지만 차로 편도 한 시간 거리니까 자주 오가긴 힘들 것이다.
그야말로 얼떨결이다. 간을 보며 한 발짝 내밀었을 뿐인데 무엇인가가 나를 확 잡아당겼다. 그 힘에 이끌려 철퍼덕 제주로 엎어져 버렸네. 세계여행과는 또 다른 긴장과 설렘이랄까. 복합적이다. 대단한 결심 없이도 그까이거 제주살이 1년이라니. 완벽한 준비란 역시 안 되는 거였어. 그냥 해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