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는 반항하고 곰팡이는 습격하고

대환장 파티!

by 소율


정신없이 짐을 옮긴 후 안으로 들어섰다. 보름 동안 비었던 집이라 썰렁하고 추웠다. 그런데 이 냄새는 뭐지??? 뭔가 야릇하고 쿰쿰한 냄새가 진동했다. 어쨌든 오늘 밤은 대충 자고 내일 정리해야지. 이전 세입자가 두고 간 침대에 시트를 씌웠다. 물론 공짜가 아니다. 5개월을 썼던 것이라는데 내가 샀다. 중고지만 중고가 아닌 가격, 용달비를 빼고 샀던 가격 그대로였다. 이해가 안 가는 제주도식 셈법이다.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고 제주도에선 제주도법을 따를 수밖에. 침대 말고도 새로 장만할 물건들이 너무 많았다. 고르고 들이는 품을 하나라도 줄이자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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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잠을 자자고. 보일러 전원을 켰다. 곧 'E3'라는 글자가 보이고 빨간불이 들어왔다. 온수도 나오지 않았다. 뭔가 잘못되었다. 아직도 오늘의 불운이 남아있다니! 제발 이쯤에서 그만하면 안 되겠니? 급한 대로 이전 세입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친절하게도 그녀는 에러코드의 원인을 검색까지 해서 캡처해 보냈다(이쯤에서 나는 침대 가격이 아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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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 공급이 중단되어 점화가 되지 않아 그렇다고 한다. 그녀는 또한 보일러 가스 밸브가 집 밖의 벽 쪽에 있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벽에 붙은 노란색 손잡이 두 개를 세로로 열자 온수가 나왔다. 그러나 여전히 방은 따뜻해지지 않았다. 보일러 화면엔 실내 온도가 10도씨란다. 잘못하면 저체온증이 생길 지경인데?


오늘 밤 안에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혹시 몰라 가져온 (구세주) 여행용 전기장판을 깔고 누웠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나던 냄새가 참을 수 없이 심해졌다. 내 머릿속에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자세히 살폈다. 세상에나, 바닥에서부터 벽의 삼분의 일 지점까지 곰팡이로 거뭇거뭇했다. 한두 군데가 아니라 사면 전체가 그랬다. 이 정도라면 도배를 새로 해주었어야지! 집 관리를 전혀 하지 않은 집주인에게 화가 치밀었다. 시간이 보름이나 있었는데 그동안 뭘 한 것인가?


공인중개사 사장님과 함께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땐 발견하지 못했던 하자였다. 방에 살림이 가득 들어있어 벽 상태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는 아직 가을이라 환기가 잘 되어서인지 냄새도 별로 나지 않았다. 집을 비우고 사람이 살지 않으니 본색이 드러난 것 같았다. 추위와 두통 속에 잠을 설치고 아침이 밝았다.


나는 20년에 가까운 전세살이 경험이 떠올랐다. 당연히 고쳐 주어야 할 하자를 고쳐주지 않는 집주인을 적잖이 겪어보았다. 싸워서 얻어내기도 했고 울며 겨자 먹기로 내 돈을 들이기도 했다. 제주까지 와서 그러기는 싫었다. 쓸데없이 소모될 에너지와 시간이 아까웠다. 공인중개사 사장님께 전화를 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사진을 찍어 보내란다. 벽의 사면 곱하기 방 2개의 사진은 스무 장에 가까웠다. 사장님은 두말없이 집주인에게 도배를 요청해 주셨다. 이틀 뒤 도배가 진행되었다. 실랑이할 여지없이 깔끔하게 중재를 해주신 사장님께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다. 일을 진짜 제대로 하는 분일세.


다음엔 보일러 차례. 집주인은 인테리어 업자를 보냈지만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 인테리어 사장님은 서비스 센터에 수리를 신청했다. 기껏 직원이 와서는 이전에 업체에서 불필요한 부품을 설치한 탓이므로 자신은 손대지 않겠다네. 그랬어도 기왕 온 김에 좀 살펴주지, 그는 매정하게 돌아갔다. 다시 인테리어 사장님 차례, 문제의 부품을 떼어냈으나 여전히 요지부동. 미치겄다! 수요일에 이사를 왔는데 토요일까지 집안이 냉골이라니. 집이 추워 다른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일요일에 서비스 센터 직원이 재차 불려 와서 하는 말. "보일러는 새것인데 한 번도 틀지 않았나 봐요. 아예 초기 세팅이 되어 있지 않네요." 아니 그럼 처음부터 봐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아저씨도 두 번씩 오느라 힘들고 나도 힘들고 이게 뭡니까? 에구, 5일에 걸친 보일러의 반항은 그렇게 해결이 되었다.


이사 오기 전에 마쳤어야 할 준비가 겨우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소소한 살림을 채울 시간. 그러나 외출했다가 현관문만 열면 여전히 곰팡내가 몰려왔다. 방 안에 들어가면 오히려 냄새가 약해진다. 아아! 도대체 어디가 또 문제야? 문득 현관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스프레이를 뿌려 놓은 듯 점점이 시커먼 곰팡이가 가득한 것이 아닌가! 습격자는 천정에 잔뜩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친다, 지쳐. 주인에게 다시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분명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을 게 뻔했다. 지난번에 한꺼번에 도배를 했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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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에 제주 집이 처음이라서요. 설마 이럴 줄은 몰랐네요.' 일 년 내내 곰팡내를 맡으며 살 수도 없고 곰팡내 나는 집에 사람들을 부를 수도 없으니 어쩐다? 이번엔 내가 직접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주인은 화를 냈다. 예전 같으면 나도 소리를 높여 잘잘못을 따졌을 테지만. 제주살이를 그런 식으로 시작하고 싶진 않았다. 주인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차분히 이야기했다. 그쪽의 입장도 이해가 되지만 이쪽의 입장도 이해를 해주셨으면 좋겠다. 제가 미처 발견 못한 탓도 있고 애초에 집 관리를 하지 않은 탓도 있으니, 서로 양보해서 좋게 결론을 내보자고. 결국 주인 왈, 도배는 안 되고 곰팡이를 닦아주겠단다.


다시 인테리어 사장님이 방문해 상태를 점검했다. 이분, 벌써 몇 번째 오시는 건지 모르겠다. 그는 심각함을 확인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못 봤네. 저번에 같이 도배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내 말이. 좋은 결론은 집주인이 아니라 사장님이 내주셨다. 본인 재량으로 도배를 해주시겠단다. 단 일정을 좀 봐야 한다고. 시간이 조금 걸린다는 뜻이다. 그것만도 어디야,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이제 현관만 해결되면 진짜 끝!)


그는 제주도에서 겨울을 나려면 육지에서처럼 보일러를 틀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그러다 난방비 폭탄을 맞는다고. 도시가스보다 훨씬 비싼 LPG 가스이기 때문에 90만 원~100만 원까지 나올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아껴 사용해도 기본 20만 원이 넘는다네. 사장님은 반복되는 방문에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친절함을 보였다. 나는 집주인보다 주변 업체 사장님들을 잘 만났어.


그동안 제주에 해마다 왔었다. 혼자만의 생각일지 몰라도 나는 제주에서 항상 운이 좋았다. 대부분 맑은 날씨였고 열에 아홉은 따뜻한 사람들을 만났으니까. 역시 제주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 것이여. 예상치 못한 파란만장을 겪는 와중에 도와주는 사람들이 척척 나타나다니 신기하지 않은가(역시 제주에선 꽤나 인복이 있는 편인가 봄). 여행이 아닌 거주의 속살을, 즉 제주살이의 만만치 않음과 만만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이만하면 괜찮은 시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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