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feat. 원숭이띠)

여긴 어딘가, 나는 누군가

by 소율

아침부터 일이 꼬였다.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노트북은 물론 신분증과 지갑이 든 크로스백을 두고 나왔다는 것을.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15년 동안 이런 대형 사고를 치기는 처음이었다. 어떻게 가장 중요한 것들만 쏙 빼놓고 올 수가 있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나를 두고 한 말이렸다. 하필 내가 원숭이띠 맞고만.


변명을 하자면, 제주 1년 살이에 신경 쓸 게 좀 많았나. 특히 풀옵션이 아닌 집을 세팅하는 것과 가자마자 맞닥뜨릴 겨울나기가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잠시 퓨즈가 나간 모양이다. 전날 모든 짐을 차에 실어 탁송을 보냈다. 모닝이 터져라 알뜰하게 물건을 집어넣었다. 다음날은 가볍게 비행기만 타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지나치게 가벼웠던 게다. 어쩐지 백팩만 걸친 몸이 묘하게 허전하더라니.


삼일 뒤에 남편과 아들이 올 것이므로 노트북은 그때 가져오면 된다지만. 당장 필요한 신분증과 카드를 어쩔꼬. 공항까지 데려다주고 떠난 남편에게 집에 다녀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남편은 전화기 너머로 잠시 할 말을 잃더니 곧 알겠단다. 싫은 소리를 각오했는데 순순히 심부름을 해주었다. 아 남편에게 미안하고 진짜 진짜 고마웠다(앞으로 내가 잘할게). 기존 비행기 표는 취소하고 약 3시간 뒤로 다시 예약했다. 남편은 방문 옆에 고이 세워둔 노트북과 크로스백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저러 드디어 비행기 좌석에 앉았는데 생각할수록 황당했다. 출발부터 어째 핀트가 안 맞냐. 나도 모르게 긴장했나 봐. 제주공항에 내려 내 차를 찾았다. 저녁 6시 반, 이미 사위는 깜깜했다. 밤 운전을 꺼리는 관계로 원래는 낮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게다가 비까지 쏟아진다. 퇴근시간에 걸린 제주 시내는 잔뜩 막히는 데다 틈만 나면 불쑥불쑥 끼어드는 얌체족들 때문에 짜증이 올라왔다.


구좌읍 행원리까지 약 1시간. 집에 거의 다 와서 남은 2.7km 구간은 가로등 하나 없는 구불구불한 시골길. 지금이야 2주 동안 드나들어 익숙하지만 첫날은 앞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가 않아 조마조마했다. 차엔 터지기 일보 직전으로 짐이 차 있고 빗줄기는 차창을 때리고 길은 누군가의 비극적인 앞날처럼 캄캄했다.


마침내 내비가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라고 낭랑하게 외쳤다. 그런데. 내 집이 안 보여.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 그 위치가 아니었다. D동은 D동인데 그 D동이 아닌 것을...... 여긴 어딘가, 나는 누군가. 오늘 안에 갈 수는 있는 것인가.


다급하게 여기저기 전화를 했다. 관리인(경비실 아님, 일종의 반장님 개념인 듯)과 공인중개사 사장님에게까지. 타운하우스 안에 D동이 두 개란다. 입구에서 윗길 말고 아랫길로 가야 한다고. 아 글쎄 어두워서 위고 아래고를 찾을 수가 없다니까요? 뭔 집들이 다 불이 꺼져 있냐고요? 다행히 빈 집에서 공사하는 분들을 발견했다. 아저씨들이 일러주는 방향대로 빙 돌아 내려가자 '나의 D동'에 도착했다. 으, 타향살이의 설움 비슷한 것이 찔끔 생기려다 말았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서 짐은 딱(!) 내일 옮기고 싶었으나. 일기예보에 의하면 내일 아침엔 비가 더 온다고라. 쓰러져도 이 밤 안에 마쳐야 한다. 하긴 이불을 꺼내야 잠을 자지. 나는 레고 블록처럼 촘촘히 쌓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현관문을 열어두고 일단 되는대로 거실로 던져 넣었다. 어수선한 게 꼭 피난민 짐 보따리 같았다. 이제야 쉴 수 있는 것이냐. 참으로 파란만장했던 하루가 아니더냐.


그러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습격하는 이것은?! 너무 길어져서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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