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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Jul 23. 2022

아들과 함께한 장마철 5박 6일


아들이 온 건 지난주 수요일 밤이었다. 일정은 5박 6일. 겨울에 한 번 왔었고 이번이 두 번째이자 마지막 방문이었다. 남편과 아들이 자주 오길 기대하며 방 2개짜리 집을 얻었건만. 뜻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지. 남편 역시 공사다망하신 관계로 거의 오지 못한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덕분에 나 혼자 널널한 집을 누리고는 있다만 아쉬움이 크다.


이곳 동쪽 동네는 장마철이라고는 하나 별로 비가 오지 않았다. (아마 서귀포 쪽은 좀 왔던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과 신나게 놀고 싶었지만 날씨가 받쳐주질 않았다. 내내 무소식이던 비가 아들과 함께 오기 시작했다. 오전에 주춤주춤 쏟아지다가 오후엔 물속에 잠긴 듯 지독하게 습하거나. 아니면 종일 구름이 내려앉아 흐리면서 바람이 1도 안 불거나. 제주도는 사계절 바람이 쌩쌩 불 줄 알았는데 장마철은 제외인가? 일단 외출을 하면 온몸이 김장철 배추가 되는 건 기본이었다. 공기는 장마철 몸은 김장철. 동시에 두 계절을 경험한다.


첫날은 오자마자 맥주 한 캔 마시고 바로 잤다, 늦었으니까. 나는 더워지기 전 아침 일찌기 움직이고 싶었다. 그러나 아들은 휴양을 원했다. 둘째 날엔 느지막이 일어나 행원 바다에 나갔다. 해수욕장은 아니고 발 담그기 좋은 작은 모래사장으로. 인근 주민들이나 한 달 살이를 하는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노는 곳이다(라고 추측한다). 즉 아는 사람만 가는 낮은 바다. 반바지를 한껏 걷어올리고 허벅지까지 담갔다. 시원한 해수 족욕이랄까. 그 후 아이는 해변 도로를 뛰었다.



셋째 날엔 빗속에 우산을 들고 다랑쉬 오름에 올랐다. 휴양을 외치던 아들이 집에만 있긴 갑갑하단다. 그렇다고 '우중 우산 오름'까지 해야겠니? 맨몸으로 가는 것보다 세 배는 힘들었다. 겨울에 그렇게 드세던 바람이 막상 필요할 땐 하나도 안 부냐! 비도 흐르고 땀도 흐르고. 나무가 우거진 좁은 길에선 우산을 접을 수밖에. 안 그럼 통과를 못해요.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땀과 비로 젖은 몸은 끈끈이를 발라놓은 듯했다.


장마철 와중에도 가끔은 선물처럼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날이 찾아온다. 습하거나 뜨겁지 않아 가을바람 비슷한 느낌. 넷째 날이 그랬다. 그럴 때야말로 사실 오름에 가기 딱 좋은 날이다. 오름 풀밭 능선에서 서늘한 바람을 맞으면 영화 속에 들어선 기분마저 든다. 나는 내친김에 동거문이 오름과 좌보미 오름 두 개를 찍고 싶었다. 평소와 달리 동행이 있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그러나 우린 습기 가득한 머체왓 숲길을 걸었다. 서귀포시 남원읍. 오늘의 운세는 분명 동쪽을 가리키는데 엉뚱하게 남쪽을 택했던 것이다. 간만의 선물에 당첨된 구좌읍과 달리 바람 로또 꽝인 곳. 왜일까? 아들이 원해서. 이틀 연속 오름은 싫다나? 그래 우리 아들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우쭈쭈.


나는 이곳을 일명 '마성의 숲길'이라 부른다. 머체왓 숲길과 소롱콧 숲길, 두 개의 숲길이 조성되어 있다. 시작점은 각기 다르고 중간에 잠시 두 길이 겹치다가 갈라진다. 문제는 어느 길에서 출발하든 반드시 길을 잃는다는 점이다. 그동안 머체왓이나 소롱콧에 갔다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는데 단 한 명도 제대로 걸었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아들과 함께니까 이번만큼은 괜찮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두 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또 헷갈리고 말았다. 머체왓 숲길은 새로 정비를 했는지 따박따박 이정표가 잘 박혀 있었다. 후반부에 아마도 소롱콧과 얽히는 부분부터 표시가 없어졌다. 결국 머체왓과 소롱콧을 섞어 빙 둘러 걸었다. 어쨌든 출발점에 무사히 돌아왔으면 된 거쥬. 땀이란 땀은 다 빼고 약간 이성을 잃은 채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너무 먹었나 봐. 배부름 위험 경보가 삑삑삑 울렸다. 그때 아부 오름이 떠올랐다. 심하게 낮아서 일부러 찾아가긴 뻘쭘한 곳. 식후 산책용으로 약 2km 30분. 스마트밴드에 총 2만 보가 찍혔다. 오랜만에 많이 걸었네.


다섯째 날, '어젠 잠깐 실성했나 봐' 하면서 전형적인 장마철 날씨가 돌아왔다. 동시에 다시 휴양 모드가 된 아드님. 우린 해안을 따라 섭지코지까지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세화 바다, 하도 바다, 종달 바다, 광치기 해변을 지나 동쪽 끝 섭지코지에 이르렀다. 캬, 바다는 모두 (에메랄드빛이 아닌) 회색빛. 먹물을 살짝 풀어놓았나. 드라이브의 맛이 살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섭지코지를 멀리서 바라만 볼 수는 없잖우. 주차를 하고 절벽길을 걸었다. 더워 너무 더워! 습해 너무 습해! 축축하고 뜨거운 바람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나름 외출복인 빨간색 민소매를 입었는데 등짝이 흠뻑 젖어버렸다. 이러면 기능성 티셔츠 입고 숲길을 걸을 때와 다를 바가 없잖아. 상큼한 관광객 버전을 실현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진 않았다. 그저 샤워하고 에어컨 빵빵하게 트는 게 최고여! 돌아가는 길, 저녁밥으로 아들이 회를 샀다. 2차는 집에서 카나페와 와인.  



금세 월요일이 되었다.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은 참 잘 갔다. 아들의 휴가는 일요일까지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책상에 앉아 일을 한다. 점심밥으로 세화오일장에서 사다 놓은 옥돔을 굽고 겉절이와 파김치, 마늘종 무침을 차려 주었다. 이후 5시 반까지 또 열심히 근무. 드디어 떠날 시간. 아들은 노트북을 정리하고 짐을 쌌다. 우리는 김녕리로 나가 고기 국수를 먹었다. 김녕리에서 공항으로 가는 급행 버스 101번이 선다. 아이가 버스에 올라탔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허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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