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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Jul 07. 2022

지겨움과 더위를 날려줄, 추리소설

여름에 읽기 좋은


무한 대기 중. 출판사에 수정한 원고를 넘긴 건 정확히 지난달 20일. 착실하게 마감을 지켰다. 그러나 이후 일정은 이른바 며느리도 모르는 상태. 원래 출판계의 습성이 그러한 지 아님 어쩔 수 없는 일의 특성일까. 출판사는 작가에게 반드시 마감 기한을 요구하나 그 반대인 경우는 없었다. 원고는 언제 다시 내게 돌아와 다음 작업으로 연결될지. 이때부터 답답한 대기 상태가 이어진다.


원고는 물론이고 표지 선정과 제목 결정까지 탁구공이 오가듯 몇 번을 반복해야 끝나는 일임에도. 그저 앉아서 기다려야만 한다. 맘 같아선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쭉 이어서 작업을 끝냈으면 싶지만. 한 번 간 원고는 며칠 만에 돌아오기도 하고 3주가 지나도 감감무소식일 수 있다. 편집자가 아니어서 그쪽 생태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계약서에는 번연히 작가가 갑이라 적혀 있지만 실제론 을인 걸 증명하는 현실.


중간에 도저히 답답증을 못 이길 때쯤 슬쩍 연락을 해본다. 너무 보채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앞으로 제 책 일정이 어떻게 되나요? 답은 두루뭉술하다. 8월 안에는 출간이 될 겁니다. (지난번 만났을 땐 7월이라 했다) 나는 그 출간일까지의 촘촘한 스케줄을 알고 싶다고요. 원고 수정은 며칠까지 마칠 건지, 표지는 언제 결정할 건지. 아니다, 그건 욕심이지. 다음 수정 날짜만이라도.


내 책뿐 아니라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작업을 하는 줄은 안다. 따라서 분명한 일정을 확정하기 힘들다는 것도. 그러나 기다리는 입장에선 다른 일마저 할 수가 없다. 이번 달에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다. 당장 내일이라도 수정할 원고가 날아올지 모르므로.   


장마라더니 이게 무슨. 기실 비는 거의 오지 않고 있었다. 물론 습도는 매일 90퍼센트까지 치솟는다. 일명 마른장마. 차라리 비가 오면 나을까? 야외 활동을 해보겠다는 의지를 합법적으로(?) 접어도 되니까. 흐리면 흐린 대로 해가 나면 나는 대로 헷갈린다. 어디 숲길이라도 걸으러 나갈까 말까. 걸어 보았다. 걸으면 지독하게 습하고 덥다. 그렇다고 집안에 앉아 있자니 어쩐지 (남들이 부러워해 마지않는) 제주살이라는 행운을 낭비하는 것 같고.


놀랍게도 제주도의 여름 기온은 수도권보다 낮았다. 이미 한 달 전부터 서울이 32도니 33도니 난리를 칠 때, 여기(섬의 동쪽 지역)는 겨우 25도 언저리였다. 오늘은 1시 8분 현재 31도. 여름을 맞은 후 가장 높다. 바람은 초속 5미터. 특별히 많이 부는 건 아니고. 시원하지도 않지만 숨이 턱 막히게 덥지도 않은. 즉 에어컨을 틀까 말까 고민하게 만드는.


일단 나는 집안의 창문 여덟 개를 모두 열었다. 아까 아침밥으로 오뚜기 토마토 리조또를 데워 먹었다. 아침 식사의 변천사를 늘어놓자면, 겨울과 봄엔 삶은 채소를 주로 먹었다. 일명 건강식에 속한다. 여름이 되자 물을 끓이는 게 집안 온도를 더욱 올라가게 만들었다. 나는 믹서기에 오이나 토마토를 갈아 마셨다. 아니면 우유에 블루베리 한 줌을 넣고 갈 거나. 그것도 곧 시들해졌다.


세화리 하나로마트에서 각종 죽 등을 사 왔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백합죽과 단팥죽은 맛있었다. 이번엔 리조또 차례. 조금 짜지만 먹을 만했다. 아들의 말이 생각난다. 엄마, 요즘엔 만들어진 조리식품도 꽤 괜찮다니까? 옛날 같은 정크푸드가 아니야. 아이가 어릴 시절부터 한살림이나 생협을 이용했다. 엄마가 슈퍼에서 파는 음식을 저기 아래로 내려다보는 걸 알고 하는 소리였다.  



리조또를 먹고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셨다. 어젯밤 늦게까지 읽다 만 정유정의 '종의 기원'을 집어 들었다. 정유정은 '7년의 밤'과 '28'로 나에게 깊이 각인된 작가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대기 시간 동안 나는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특히 추리소설만.  왜냐고? 지겨움과 더위를 날려 줄 시원한 한 방으론 제격이니까. 여름과 어울리잖아? 정유정은 추리소설이라기보단 범죄소설에 가깝지만.


처음엔 누구나 추천하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읽었다. 대표작인 '가면 산장 살인사건', '용의자 X의 헌신'. 나의 취향이 남들과 사뭇 다른 걸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솔직히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지루했다. 일본 작가가 모두 그렇지는 않겠으나 거의 대화체로만 이루어진 내용. 사건은 대화로 시작해서 대화로 진행되고 대화로 끝을 맺었다.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조금도 나를 자극하지 못했다. 한 번 더 속아보자는 심정으로 선택한 '악의'는 좀 나았다. 마지막 반전이 허를 찔렀다. 50퍼센트의 만족.


히가시노 게이고를 아니 일본 추리소설을 버렸다. (뭐 취향은 자유잖우?) 나는 다른 작가를 찾아보았다. 읍내에 있는 동녘 도서관. 그곳에선 내가 검색한 책의 절반쯤만 소장하고 있었다. 아쉬웠다. 먼저 추리소설의 여왕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골랐다. 아 정유정이 생각났다! '종의 기원'과 '완전한 행복'을 꺼냈다. 한국 작가의 소설로 또 '라일락 붉게 피던 집'과 '밤의 여행자들'을 선택했다. 외국 작가의 작품으로는 '시간의 딸', '환상의 여인', '스노우맨'이 간택되었다. 이것저것 합해서 총 아홉 권을 빌렸다.


12시, 점심은 고등어조림(며칠 동안 냉장고에 들어있어서 얼른 먹어치워야 했다). 이윽고 종의 기원 막장을 덮었다. 정유정은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나는 정유정 류의 치밀한 묘사에 흥분하는 독자였다. 영화를 보는 것처럼 눈과 손에 잡힐 듯한 장면들. 그것이 몰아칠 때 재미가 솟았다.


어느덧 엉덩이와 이마에 땀이 찼다. 흥분해서는 아니고 더워서. 날씨와 싸우는 마음으로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 아침부터 에어컨을 가동하는 건 어쩐지 지는 기분이었다. 점심도 먹고 책도 마저 읽었다. 샤워하고 글을 쓰니 오후 3시에 가깝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흐르므로 이유 모를 거부감이 사라진다. 26도에 맞추어 놓은 에어컨은 '지금 실내 온도가 30도라고요!' 소리친다. '쓸데없이 자존심 부리지 말고 진작에 틀었어야죠!' 웅웅거린다.  


거실 창밖 후박나무엔 짱짱한 햇볕이 내려 꽂힌다. 마른 장마고 뭐고 다 지나갔나? 본격 한여름이 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나가면 죽음일 테지. 시원한 초정탄산수를 한 잔 마셔야겠다. 나는 주방으로 가면서 두툼한 '스노우맨'을 쳐다보았다. 다음은 네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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