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가기 전날, 갑자기 엄마가 오셨다.
다음날이 첫 번째 6개월 정기검진 결과 듣는 날이었다. 처음엔 김치랑 반찬을 택배로 보낼까 하다가 아무래도 직접 가고 싶으시더란다. 엄마에게 뭔가 느낌이 왔나 보다. 결과 나오면 전화로 알려 드리려고 했는데 병원 가는 걸 아시는 것처럼 딱 맞춰 달려오셨다.
항암 때 엄마, 아부지가 같이 계셨다가 내려가신 후로는, 반찬을 배달시켜 먹었다. 오른손잡이의 오른쪽을 수술해놨으니 주부 노릇을 온전히 할 수가 없다. 누구는 언니나 동생이 혹은 다른 가족들이 반찬을 해다 준다지만 내게는 그런 복이 없다. 오직 연로하신 엄마뿐이다. 충주에서 매번 반찬 때문에 올라오실 수도 없는 일이라 대책은 배달 반찬을 먹는 것이었다. 그러다 아무래도 내 손으로 해 먹어야지 싶어서 한 달쯤 배달을 쉬었다. 반찬을 몇 가지 만드는 날은 다른 일을 못 한다. 다른 볼일을 본 날은 반찬을 못 만들겠다. 체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다. 일 좀 하면 팔과 어깨가 쑤셔서 다음날까지 지장을 준다. 결국 다시 배달을 불렀다. 어쩌겠니. 아직은 해주는 반찬을 먹어야 할 때인가 보다.
김치, 알타리, 멸치볶음... 엄마는 반찬과 함께 추석 때 얘기, 충주에 사시는 이모들 얘기며 밀린 얘기를 한가득 풀어놓으셨다. 항암 때도 이렇게 하루 종일 엄마랑 수다 떠는 게 주요 일과였지. 엄마는 원래 당일 내려가실 요량이었다. 아부지께 딸네 집에 간다는 말도 안 하고 급작스레 오신 터였다. 허나 다음날 결과가 궁금해 발이 떨어질 리가 없었다.
묘한 일이었다. 병원 문 안에 들어서자 가슴이 떨리기 시작한다.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도 역시나. 이래서 다들 '6개월 인생'이라고들 하는구나. 6개월 검진 때마다 이상 없음 통보를 받아야 다시 또 6개월만큼은 맘 놓고 산다는 얘기다. 암환자들은 보통 음식에 목숨 건다. 채식은 기본이고 온갖 몸에 좋다는 걸 챙겨 먹으려고 애를 쓴다. 나도 가급적 해롭다는 음식은 피한다. 하지만 음식보다도 마음 편안하게 지내는 걸 1순위로 놓았다. 원래도 오랫동안 한살림과 생협 위주로 먹었던 터라 음식 때문에 암이 왔다고는 생각 안 하니까. 집 앞 청계산 등산과 대공원 걷기, 하루하루 즐겁게 살기가 내 관리법이다. 아무리 그랬어도 결과를 듣는 일은 역시 떨리고 긴장되는 거였다.
유방암 센터에 가기 전에 정신건강의학과부터 들렀다. 호르몬 치료를 시작한 이후로 불면증이 심해서 수면을 유도하는 약을 먹고 있었다. 즐겁게 지내는 낮시간과는 상관없이 여성호르몬을 억제하는 치료는 지독한 불면증을 불러왔다. 어쩐 일인지 수면제는 전혀 듣지를 않는데 정신건강의학과(정신과라는 어감이 부담스러운지 언제 바뀌었는지 몰라도) 약은 잘 듣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과거지사. 한 달 전쯤부터 다시 불면증이 도져서 이 날은 약을 바꿔와야 했다. 바꾸는 약이 제발 효과 있기를.
드디어 유방암 센터 진료시간.
"지난번에 검사를 여러 개 하셨어요."
J교수는 컴퓨터 화면을 쭉 내려다본다. 뭐라 뭐라 의학용어로 가득한 화면. 저 안에 내 상태가 어떤지 쓰여있다는 거다. 조마조마하다.
"음, 아무 이상 없네요. 6개월 뒤에 다시 봅시다."
"아,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그는 친절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세한 설명 따위는 하는 법이 없었고 질문에도 성의 없게 답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진료실이 카페라도 되는 양 태연스레 커피와 쿠키를 놓고 앉아 있는 날도 많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엄마! 아무 이상 없대!"
"아이구, 정말 감사합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엄마는 나를 꼭 껴안으며 눈시울이 그렁그렁 하시다. 나도 엄마 등을 타독타독 해드린다.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앞으로도 괜찮을 거야."
남편은 내 예언이 맞았지? 하는 얼굴이다. 이제 속이 후련하다. 엄마도 내려가시는 발걸음이 가볍겠다. 무엇보다 엄마가 안심할 수 있어서 기쁘다. 엄마 앞에서 나도 힘든 티를 낸 적이 없었지만 엄마 역시 딸 앞에서 힘든 티를 내시지 않았다. 속으로야 얼마나 애가 탔겠는가.
지금처럼 매일을 기쁘게 즐겁게 살아야지. 간혹 화나거나 슬플 때도 있겠지만 바람이 불 듯 그렇게 흘려보내야지. 내게 오는 모든 일을 선물처럼 받아 들기. 그리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