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만나러 간다

매일 그대와

by 소율



지난 5월, 6월 동안 매일 등산을 했다.

1주일에 다섯 번 정도는 2시간씩 산에 갔다 온다. 곱디 고운 연두에서 성숙한 초록으로 변하는 시간의 마술에 감탄하며 지냈다. 애기나리, 뱀딸기 꽃, 층층나무 꽃, 아까시꽃, 요즘은 밤꽃까지 매주마다 산의 입주자들은 사이좋게 바뀌었다. 그들은 내가 먼저 이 산을 차지하겠노라고 다투지 않았다. 차례차례 순서를 기다렸다가 자기만의 절정을 피워낸 뒤에 조용히 사라졌다. 이전에도 청계산에 자주 갔지만 이처럼 아름다움을 민감하게 느끼지는 못했다. 음, 환자가 되니 오감이 활짝 열리는 거 같다.



예전이라면 1주일에 다섯 번 등산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은 그냥 자연스럽게 그리 한다. 목적이 확실하니까. 일단 최저 상태인 체력을 키워야 하고, 다음으로는 살을 빼야 하기 때문이다. 집에만 있으면 우울감이 자주 찾아오므로 우울감(혹은 우울증) 예방 차원에서도 그렇다. 두 달 동안 열심히 등산을 해본 결과 이 세 가지 목적은 확실히 달성하고 있는 중.


아직은 수술하기 전 체력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 살 빼기, 이건 가장 효과가 크다. 무려 3kg이나 감량!!! 항암을 끝내고 나니 5kg이 늘어있더라. 붓고 살이 찌는 건 항암의 부작용 중 하나다. 얼굴은 보름달이고 어깨도 둥실둥실, 배와 엉덩이와 허벅지는 어찌나 부풀어 있던지. 거울을 보며 말했지.


'저 여자는 도대체 누구야?'


작년 여름에 입던 옷들을 도저히 입을 수가 없었다. 당장 입을 옷이 없다는 게 의외로 큰 스트레스였다.


작아진 내 옷들을 보니 이전의 내가 얼마나 날씬하고 예뻤는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하체에 살이 많다는 이유로 한 번도 나 자신이 날씬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단점만 바라봤다. 늘 조금 더 빼야 하는데, 이런 생각만 했다. 아니었다. 나 정말 예뻤구나. 충분히 예뻤는데도 내가 그걸 인정하지 않았구나. 나는 나를 몰랐고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구나. 나는 순간을 살지 못했고 늘 과거나 미래를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 삶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살았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나는 늘 이쁘고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그걸 잊지 말자.


둥실둥실한 나를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어쨌거나 살은 빼야 했다. 지방세포에서도 호르몬이 나와 암세포를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유방암 환자는 절대 살찌면 안 된다. 목표는 일단 수술 전의 체중으로 돌아가는 것. 5kg을 감량해야 한다. 운동만으로는 살 빼기가 어렵기 때문에 식이요법을 같이 했다. 식이요법은 별 게 없다. 그냥 소식하는 것. 밥 반공기에 채소반찬 위주로 먹는다. 저녁밥은 아침 점심보다 양을 팍 줄였다. 기타 간식은 거의 먹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몸에 안 좋다는 음식들 - 튀긴 것, 고기의 기름기, 인스턴트, 밀가루, 단 것 등 -도 거의 먹지 않는다.


사실 살 빼기가 엄청 힘들 줄 알았다. 예상보다 쑥쑥 빠지고 있어서 놀라고 있는 중. 등산의 효과인지 소식의 효과인지 잘 모르겠다. 어떤 환우는 그런다, 항암 후유증으로 찐 살은 몇 달 지나면 저절로 빠진다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제까지 살면서 저절로 살이 빠진 적이 없기에(저절로 살이 찐 적은 많았다). 운동도 식이요법도 아니고 설마 저절로 살이 빠지고 있는 중인 건가? 하여튼 체중감량은 계속되어야 한다. 남은 2kg을 향해 전진~


우울감. 얘는 정기적으로 나를 찾아온다(얘도 지금 하고 있는 항호르몬제 약과 난소 억제 주사 부작용이다). 아직 우울증까지는 아니어서 그런대로 살살 달래어 보내곤 한다. 등산을 매일 하니 얘가 잘 찾아오지 못하고 있다. 산에 가면 기분이 좋아져서 그럴 거다. 우리 집 뒷산인 청계산 매봉 가는 길. 길이 순하고 온통 그늘이 진다. 가벼운 운동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전처럼 매봉까지는 못 가고 중간쯤 약수터까지 간다.


이렇게 좋은 길을 예전에는 왜 별다른 감흥도 없이 다녔을까? 똑같은 길인데도 마치 다른 길인 양 '아, 좋다!' 감탄하면서 다닌다. 체력을 키우고 살을 빼고 하는 걸 떠나서 그냥 산길을 걷는 자체가 즐겁다. 우거진 가지들 아래에 바람이라도 시원하게 불면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작년 세계여행에서도 우리는 숲을 찾아갈 때가 가장 행복했다. 폴란드 비 아워 비에자 숲은 정말 멋졌지. 나머지 2kg을 다 감량하고 정상체중이 되어도 등산은 매일 할 것이다. 예전처럼 눈 덮인 덕유산을 갈 정도로 건강해지고 싶다.



유방암 치료라는 게,~, 그렇다. 수술하기 전에는 멀쩡했는데 막상 수술을 시작으로 치료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진짜 환자가 되어버린다. 유방암을 가지고 있더라도 아주 최악이 되기 전까지는 통증도 없고 일상에 아무 불편이 없거든. 유방암 치료 자체가 온갖 부작용을 불러온다.


수술의 부작용은 팔을 자유롭게 못 쓰고 평생 부종의 위험이 있다는 것. 항암치료의 부작용은 붓고 살찌는 것, 심장과 신장에 무리를 주는 것, 구토, 오심, 구내염, 변비, 설사, 불면증... 방사선 치료의 부작용은 검게 그을리고 피부 세포가 죽어서 땀도 안 나고, 감각이 무뎌지고 심하면 화상에 물집까지. 항호르몬제 약과 난소 억제 주사의 부작용은 우울증, 불면증, 열감과 오한의 반복.


암이 퍼져서 죽는 것보다는 부작용을 감수하고 치료를 받는 게 이득이란다. 그래도 그렇지, 부작용이 없는 치료법은 없을까? 의술이 발달했네 어쩌네 하지만 아직도 멀었다. 치료가 환자를 더 힘들게 하면 어쩌란 말인가? 고통 없는 치료가 진짜 치료지, 일상을 힘들게 하는 온갖 부작용을 참아야 하는 치료는 제대로 된 치료가 아닌 듯싶다. 이것이 그 잘난 의학의 현주소라니. 그러고 보면 암이 무섭긴 무서운 병인 게다.


그래도 반가운 소식은 열심히 운동을 하면 그 부작용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점이다. 방법은 운동밖에 없다. 부작용을 견뎌내고 즐겁게 행복하게 살려면 꾸준히 운동을 해야 한다. 그래서 매일 그대와 만나러 간다. 나무들, 잎사귀들, 서늘한 그늘, 다람쥐, 청설모, 박새, 그리고 시원한 바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3. 아무 이상 없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