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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May 07. 2023

어린이날과 상관없는 가사노동의 날

어린이날에 어른 연습

5월 5일 어린이날과 상관 없어진 지는 오래되었다. 참고로 아들이 이십 대 후반 어른이임. 비 오는 어린이날, 어린이가 없는 나는 청소에 꽂혔다. 고백하자면 평소 가사노동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내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던 2011년 가을부터 아예 손을 놓다시피 했다. 수술 후 미니 식기세척기를 들였고 각종 치료 중 반찬은 배달시켜 먹었다.


10여 년이 지났지만 이미 놓은 집안일에 도로 매달리게 되진 않았다. 수술 때문에 오른팔을 아껴야 했고 체력은 도무지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전이라고 해봤자 그리 건강 체질도 아니었음) 유방암 경험자라는 신분은 가사와 멀어지기에 타당하고 충분한 이유가 되어 주었다. 그 즈음 본격적인 여행과 여행 에세이 출간, 강의 등으로 전업주부에서 여행작가, 강사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섰다. 나는 더욱 가사에 분배할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을밖에.   


집에선 국이나 찌개 정도를 간단히 끓이고 반찬은 주로 (나보다 솜씨가 나은) 반찬가게에서 사 온다. 집안일을 줄이기 위해 전자제품이 점점 늘었다. 기능을 다한 미니 식기세척기를 버리고 제대로 된 식세기 이모님을 모셨다. 덩치가 큰 유선 청소기가 버거워서 가벼운 (다른 말로 비싼) 무선 청소기로 바꾸었다. 천걸레 대신 물걸레 청소포를 밀대에 끼워 닦았다. 그것마저 번거로워 로봇 청소기로 대체되었다. 최대한 간편하게 최소한의 노력을 들이도록.


그러나 아무리 줄인다고 해도 집에서 사람이 먹고 자고 생활하는 한 가사노동의 굴레는 결국 돌아오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해야 생활이 유지되니까. 곧 집을 떠날 아들이 오히려 자기 빨래며 식기세척기 돌리는 정도는 책임진다. 평생 같이 사는 남편은, 여기서 깊은 한숨을 내쉬고, 후. '가사일이 먹는 건가요?' 수준으로 나 몰라라 일관한다. 참다못해 쓰레기를 정리하고 치우는 것 단 한 가지를 맡겼다. 그저 주말에 한 번만 버리면 된다.


현실은 이렇다. 주말에도 집에 붙어있질 않을뿐더러 어쩌다 집에 있어도 도통 알아서 하질 않는다. 내가 쓰레기 당번임을 일깨우면 그제야 가뭄에 콩 나듯 할 뿐. 내가 나를 바꾸기도 만만치 않거늘 설마 남편을 바꾸겠냐 싶어 내심 포기를 했다만. 설마 죽을 때까지 저럴까 의문이 들 때마다 아득하다.    


어린이날의 시작은 빨래였다. 세탁기에서 옷을 꺼내다 무심코 고무패킹을 뒤집어 보았다. 미끌미끌 거뭇거뭇하다. 세상에, 언제 닦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걸레로 한 바퀴 돌아가며 닦아내었다. 때가 시커멓게 묻어 나온다. 이렇게 하면 되나? 효과적인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오랫동안 통돌이 세탁기를 쓰다가 드럼 세탁기로 바꾸었다. 그러고도 몇 년이 흘렀지만 관리에는 정말 무심하고 무식했다. 사실 기계에는 약한 편이라 손대기가 꺼려졌다.



나는 오오랜만에 세탁기 설명서를 꺼냈다. 기계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내 모습. 고로 설명서 따위를 꼼꼼하게 읽어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귀찮음도 큰 이유고요. 설명서는 말씀하셨다. '염소계' 표백제를 넣어 통살균 코스로 세탁통을 청소하고 고무 패킹은 '산소계' 표백제로 닦으란다. 횟수는 한 달에 한 번. 염소게, 산소계라? 조금 복잡하게 느껴진다. 어쨌든 고무 패킹은 닦았으니 있는 세제를 넣고 통살균 코스를 눌렀다.


세탁기 위엔 건조기가 앉아 있다. 다용도실이 좁아 세로로 쌓아놓았다. 건조기의 먼지 거름망을 꺼내었다. 평소엔 먼지만 탁탁 털어 도로 끼운다. 이번엔 이쑤시개와 면봉으로 거름망 가장자리 쏙 들어간 곳까지 세심하게 먼지를 빼냈다. 의자를 놓고 올라가 거름망을 뺀 자리를 내려다보니 거기도 먼지가 꽤나 숨어있다. 의자 없인 눈과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이었다. 어렵게 손가락을 집어넣어 먼지를 닦았다.


다음엔 공기청정기. 맨날 작동시키지만 정작 필터가 어떤 상태인지 몰랐다. 궁둥이 부분에 위치한 필터를 빼내었다. 말해 뭣해, 여기도 먼지가 가득 쌓였다. 필터가 더러운데 어떻게 공기를 정화시켰을까? 내내 헛짓을 했구나. 작은 솔로 겉에 있는 필터의 먼지를 털어내고 물로 살살 씻었다. 안쪽 두 종류의 필터는 일 년에 한 번씩 교체해야 한다고 설명서에 적혀 있다. 아들 말로는 2년 전에 필터를 갈았단다. 당장 새 필터를 주문했다.


무선 청소기로 온 집안을 밀었다. 역시 보통 때와 마음가짐이 달랐다. 클리너 헤드를 종류별로 바꿔 구석구석 먼지를 빨아들였다. (평소엔 헤드 하나로 대충 민다) 그 후 로봇 청소기를 풀었다. 로봇 청소기가 일견 편해 보이지만 사용하려면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 바닥에 널린 각종 물건을 싹 치워야 하니까.


애초에 좁은 집인데다 남편과 아들이 늘어놓은 물건이 가득하다. 치우지 않고 돌려봐야 여기저기 걸리고 안 닦이는 부분이 많아 의미가 없다. 특히 로봇이 제 일을 마친 후 밑바닥에 달린 걸레를 빨아줘야 한다. 즉시 빨아놓지 않으면 다음에 쓰기 곤란하다. 말이 좋아 로봇이지 사람 손길이 앞뒤로 가주어야 사용 가능한 반인반로(?)가 되시겠다. 여하튼 로봇 씨가 물걸레질을 일차로 하고 그래도 남은 얼룩은 다시 손으로 닦았다. 책상과 책장, 서랍장, 스탠드등 위도 말끔히 먼지를 없앴다.


싱크대에 가득 쌓인 그릇은 식세기에 넣었다. 그나마 쉬운 일에 속한다. 손으로 일일히 설거지하는 것보단 한결 수월하다. 칸칸이 잘 맞춰 넣어야 한다. 맨 윗칸에 수저를 하나씩 홈에 끼우는 게 시간이 걸린다. 다른 가전에 비해 따로 관리할 부분이 없다는 점이 제일 마음에 든다.


종일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허리는 아파진다. 아직도 일이 남았다. 청소계의 화룡점정인 화장실 곰팡이 닦기! 내가 제일 힘들어하는 작업이다.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화장실에 줄눈을 시공했다. 12년 전 아들과 세계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남편이 (예전 집) 화장실을 곰팡이 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나는 여전히 그 끔찍함이 잊히지 않는다. 바닥과 천장, 벽을 가득 메운 새카만 곰팡이! 줄눈이 곰팡이를 방지한다기에 새 집엔 망설임 없이 돈을 썼다.


나는 샤워를 하고 나면 반드시 유리 닦이로 벽과 바닥의 물기를 제거한다. 또한 화장실 문을 매일 열어 습기를 말린다. 창문이 없기 때문이다. 눈치챘는가? 아예 곰팡이가 생기지 않게 미리 조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이 흐르자 곰팡이가 슬금슬금 생겨났다. 온갖 세제로 타일 사이의 곰팡이를 닦아냈다. 락스를 희석해 휴지에 뿌려 붙이는 방법도 썼다. 냄새가 심해 자주 하고 싶진 않았다. 어쩐 일인지 바닥 네 모서리의 줄눈이 들떠 벗겨지는 중이다. 저것도 어찌 손을 봐야 할텐데 걱정이다.                     


얼마 전 유튜브 광고에서 칼날처럼 좁고 단단한 솔을 발견했다. 영상에선 슥슥 밀 때마다 시커먼 때가 잘도 빠졌다. 광고를 다 믿는 건 아니지만 속는 셈 치고 샀다. 화장실 타일 틈의 곰팡이를 닦아내는 용도로 쓰면 좋을 것 같았다. 청소하느라 흘린 땀을 샤워한 후 즉시 화장실 청소에 돌입했다. 먼저 변기와 세면대를 깨끗이 닦았다.


마침내 새 솔을 시험할 시간. 세제를 묻혀 영상처럼 빡빡 닦아보았다. 누릇하고 시커먼 부분이 한결 깨끗해졌다. 오 생각보다 괜찮은걸? 이만하면 성공이다. 바닥에도 세제를 뿌려 문질렀다. 아 다시 땀이 흐른다. 이것이 샤워인가 노동인가? 헤어드라이어로 젖은 머리를 말리자 머리카락이 온통 바닥에 떨어진다. 물을 뿌려 흘려내고 유리 닦이로 밀었다.



이제 일이 다 끝났을 것 같지만 아니올시다. 읽지는 않았어도 가지런히 모아둔 설명서를 모두 꺼냈다. 이참에 자세히 살펴볼 셈이다. 기계가 무섭다고 멀리한들 내 할 일이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어차피 할 팔자라면 제대로 알아야겠다. 세탁기, 건조기, 공기청정기, 로봇청소기, 제습기까지. 특히 청소 방법을 집중적으로 찾아서 한자 한자 읽었다. 더해서 인터넷에 '드럼 세탁기 청소', '고무 패킹 청소'로 검색을 했다. 아까 대충 한 게 찜찜했다. 결론, 세탁조 클리너를 넣고 통살균 코스를 돌리면 패킹과 세탁조 청소가 동시에 해결된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매월 초에 반드시 세탁기를 청소하리라.


벌써 저녁때. 어깨가 쑤시고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대신 집안은 반짝반짝했다. 어린이날이 다 뭐다냐, 아무리 어린이가 없는 집이지만 나에겐 혹독한 가사노동의 날이었다. 약간의 근육통과 함께 여러 가지 교훈을 얻었다. 귀찮다고 미루지 말 것. 남편에게 쓸데없는 기대를 품지 말 것. 어차피 나의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달려들 것. 매달 할 일과 매년 할 일을 영리하게 챙길 것. 기계를 사지만 말고 제대로 관리할 것. 관리할 방법을 찾고 배울 것.


전자제품도 집도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냥 놔두어도 저절로 유지되는 건 없다. 관심과 시간, 에너지를 들여야 좋은 모습으로 오래간다. 외면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다. 누군가 대신 처리해 주지도 않는다. 미루어 본들 한꺼번에 몰아닥칠 뿐이다. 그걸 감당하려면 팔다리가 부들거리는 지경에 이르고야 마는 것이다. 


삶을 이루는 대부분의 요소는 소소하고 하찮고 귀찮고 하기 싫고 모양이 나지 않는 그런 일들이다. 그것을 유연하고 능숙하게 다룰 때 비로소 성숙한 어른이라 할 수 있겠지. 나이만 먹는다고 그럴듯한 어른이 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어린이날, 어른으로 뿌리박고 살아갈 태도를 연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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