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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May 21. 2023

불면증 약을 줄일 수 있을까? 끊을 수 있을까?

내 영혼의 따귀를 후려치는, 불면증



유방암 10년을 무사히 넘겼다. 올해부터 정기 검사가 세 개로 줄었다. 유방 초음파와 유방 촬영, 골밀도 검사. 골밀도 검사는 필수 사항이 아니다. 골감소증이 있어 지켜볼 겸 계속 받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기초적인 검사만 남은 셈이다. 유방암 자체와 관련해서는 마음을 놓아도 된다는 뜻이다. 지금 나에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유방암을 치료하다가 생긴 불면증. 그로 인해 삼 개월에 한 번씩 정신건강의학과에 다닌다. 유방암을 겪었다고 해서 다 나처럼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리진 않는다. 내가 유독 심한 편이다. 십 년 넘게 약을 먹고 잔다고 일명 '약밍아웃'을 하면 다들 놀란다. 가끔 나조차 새삼스레 놀란다. 이래도 되나? 사람이 제힘으로 자지 못하고 약의 힘으로 자도 괜찮은 걸까. 설마 죽을 때까지?


줄여도 보고 끊어도 봤는데 처참히 실패했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전혀 잠을 자지 못한다. 여기서 '전혀'가 의미하는 건 '단 한 시간도'이다. 7년이 넘어서자 사실상 포기했다. 약을 먹고 잘 수 있으니 그래도 다행 아닌가, 약을 먹고도 못 자면 그게 진짜 큰일 아닌가. 긍정을 넘어 (무리한) 초 긍정의 자기 위안을 삼기도 했다.


작년 제주살이를 할 때 어쩔 수 없이 병원을 바꾸었다. 제주 시내 모 병원에 가서 서울성모병원(나의 유방암 치료 병원)에서 처방한 것과 똑같은 약을 달라고 했다. 의사는 성분이 같다고 했지만 제품의 일부가 달랐다. 몸은 작은 변화를 예민하게 알아채고 반항했다. 결국 정기적으로 비행기를 타고 서울 병원을 오가야 했다.



평소 여행을 하고 책을 쓰고 강의를 한다. 인생 후반전을 활기차게 살고 싶은 욕구가 넘친다. 잠을 못 자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법.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된다. 약을 먹는 데서 오는 불안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할 거라는 불안이 훨씬 컸다. 그것만큼은 막고자 여전히 약이 필요하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수면제가 아닌 데다 약의 용량이 적은 편이다. 가끔 의사에게 물어보면 내성이 없어 오래 먹어도 괜찮다고, 안심하라고 한다. 물론 의사 말이라고 해서 온전히 믿진 않는다. 딱히 뾰족한 대책이 없으니까 그러려니 받아들일밖에. 


가끔 의심스러워서 '너무 오래 먹고 있는데 약을 줄여야 하지 않을까요?' 하면 '줄일 수 있으면 줄여 보시고 안 되면 그냥 드세요.'라고만 할 뿐. 의사들의 진단은 언제나 간단하고 편리했다. 환자가 물어보지 않는 한 절대 어떠한 제안도 하지 않는다. 몇 년이고 증상에 따른 처방만 내리면 할 일 끝이다. 


병원에 갈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안개가 자욱한 제주의 중산간 도로를 운전하는 기분이랄까.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과의 이름이 신경정신과에서 정신건강의학과로 달라졌다. 주치의도 여러 번 바뀌었다. 의사마다 소견이 제각각인 건 딱히 놀랍지도 않다. 


이번 진료에서 만난 새로운 주치의. 나는 몇 년 전 약을 줄이고 끊었다가 실패했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결국 끊지 못하면 평생 먹어야 하냐고 물어보았다. 그게 늘 나를 짓누르는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이전 주치의가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을 지적했다. 용량은 적지만 개수가 많단다. 약은 멀타핀, 트라조돈, 리보트릴, 쿠에타핀, 데파스 총 다섯 개였다. 할 수 있으면 데파스부터 반 개로 줄이란다. 그 후 리보트릴도 줄일 것을 권했다. 두 가지는 계속 먹는 게 조금 위험성이 있단다. 그동안 어떤 의사도 알려주지 않은 정보였다. 언제는 안전하다더니, 의사마다 생각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남편 말처럼 취미 생활이나 즐기면서 전혀 스트레스받지 않는 상황을 만들면 어떨까? 강의니 출간이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몸 관리에만 전념한다면? 애초에 그랬어야 했나? 그랬다면 불면증에서 쉬이 벗어났을까? 별의별 근거없는 추측이 고개를 쳐든다.


어제 지인을 만났다. 의사는 아니지만 수십 년 의료 계통에 종사하는 분이었다. 조언을 들으려고 내 약 처방전을 보여주었다. 그녀 역시 깜짝 놀란다. "한 움큼이나 먹었네요?!" 불면증 약을 먹는 줄은 알았지만 다섯 개일 줄은 몰랐다고 말이다. 그리곤 다른 의견을 내비쳤다. 일보단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원인일 거라고.


아하. 내 인생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지. 아니 있지. 그걸 두고 엄한 데다 누명을 씌웠다. 따지고 보면 내게 여행과 일이 있어 오히려 10년을 거뜬히 버틴 게 아닌가. 은인을 원수로 몰다니. 참으로 간사하고 배은망덕하여라.


들여다보기 싫어 감추어 두었던 것. 워낙 오래되고 깊이 박혀 제쳐두었던 것. 있어도 없는 셈 친 것. 이번 생에선 풀 수 없을 거라고 단념한 것. 누구에게나 가슴 한 구석엔 캄캄한 동굴 하나가 자리 잡고 있지 않나? 나만 그런가? 작년부터 심리 상담을 받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포기한 줄 알았는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소망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제주살이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 후 상담실을 알아보려고 했다. 어느새 일상에 밀려 잊어버렸다. 불면증은 어쩌면 잠든 내 영혼을 후려치는 따귀일지도 모르겠다. 숙제를 어서 해결하라고, 그래서 마침내 고통에서 벗어나라고. 뭐라도 하긴 해봐야 할 터인데, 너무 늦기 전에 말이다.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시작하자. '데파스'를 반 개로 줄이는 것부터.



이 글을 써놓고 열하루가 흘렀다. 먼저 일주일 동안 데파스를 반 개로 줄여 먹었다. 의외로 문제없이 잘 잤다. 한 개나 반 개나 아무 차이가 없었다. 진작에 줄였어도 괜찮았던 걸까? 자신감이 심하게 붙었다. 다음날 데파스를 아예 빼버렸다. 아 그건 무리였나 보다. 밤새 뒤척였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천천히 가자. 누가 떠다미는 것도 아니고 기한이 정해진 것도 아니다. 데파스 반 개를 또 반으로 잘랐다. 즉 4분의 1개. 첫날은 자다 깨다 어수선했다. 둘째 날부터는 뜻밖에 멀쩡하다?! 어젯밤이 나흘째. 이런 식이라면 데파스를 떨구는 건 어렵지 않을 듯하다. 생각보다 순조롭다. 

요즘 정혜신의 책 '당신이 옳다'를 읽고 있다. 아니 듣고 있다. 저녁에 누워서 운동할 때 오디오북으로 틀어 놓는다. 심리적인 문제가 있다면 상담실이나 정신과 의사에 의존하는 것보다 '자기 존재'에 다가가라고 말한다. 어떤 전문가라도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소용이 없다고. 환자를 증상으로만 바라보면 약 처방 밖에 할 게 없다고. 자기도 오랫동안 그랬다고 고백했다. 내가 이제껏 만났던 의사들과 똑같았다. 

종이책으로 사서 제대로 읽고 싶어졌다. 나는 소리보다 텍스트가 편한 사람이다. 잠깐 딴 생각에 빠지면 이미 소리는 나를 두고 저만치 앞서가버린다. 글자는 내 정신이 다른 곳에 다녀와도 그 자리에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상담보다 이 책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약을 줄이는 과정은 사실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비슷하다. 반씩 사분의 일씩 가르며 잘 될까 안 될까 반신반의의 반복. 깎은 손톱보다 작은 알약 조각이 나를 들었다 놨다 한다. 해보는 데까지 해보는 거다. 너무 기대하진 말고.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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