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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Jun 08. 2023

결국 미니멀리스트는 되지 못했어


코로나가 극성이던 2021년 호기롭게 일 년 동안 옷을 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었다. 실험은 절반쯤 성공했다. 전혀 사지 않은 건 아니지만 거의 옷을 사지 않고 잘만 지냈다.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욕심내지 않는 습관이 자리 잡았다. 나아가 쇼핑 자체와 멀어졌다.


아래 글 참조.



한 해 뒤 제주 시골에서 일 년 살이를 하면서 뜻밖의 상황과 마주쳤다. 역으로 사고 싶어도 사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경험한 것이다. 대부분의 물품이 귀하고 비싼 섬에선 미니멀리즘이 일종의 사치처럼 느껴졌다. 안 사고 줄이는 건 뭔가가 넘칠 때나 가능한 일 아닌가. 굶주린 자가 다이어트를 할 수는 없는 노릇. 때로는 소소한 필수품조차 구하기 어려워서 미니멀이 다 뭐냐, 속으로 외치곤 했다.


나는 애초 풀옵션 집에 들어가고자 했다. 아쉽게도 내가 구한 집은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식탁 외엔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덜어내기는커녕 채워야 할 형편이었다. 누군가에겐 오히려 미니멀리즘을 (강제로 혹은 적극적으로) 실천할 기회였을 수도 있겠다. 내가 그 정도로 현명했다면 좋았으련만. 나는 기본적인 물건이 없으면 심히 불편을 느끼는 보통 사람에 불과했다. 내내 제주도는 '쇼핑 지옥'이라고 불평했으니까.


일부러 안 사는 것과 원하는데 못 사는 것을 모두 해보았다. 자발적이냐 비자발적이냐. 역시 비자발적인 상황이 훨씬 괴로웠다. 이래저래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는 꿈은 저절로 사그라들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미니멀리즘에 대한 경계선이 사라졌다. 단순하다. 필요하면 사고 필요하지 않으면 안 사는 거다.


지난 토요일 몇 달 만에 쇼핑을 하러 나섰다. 아침 걷기 할 때 입는 운동복을 개비해야 했다. 오래 입고 많이 빨아서 줄어든 것, 색깔이 맘에 들지 않아 손이 가지 않는 것, 길이가 짧아 불편한 것들을 바꿀 때가 되었다. 보통 나는 등산복 매장에서 기능성 티셔츠를 사 입는다. 단서는 반드시 이월 상품이나 할인 상품일 것. 신상품 하나 가격으로 세 장은 살 수 있단 말씀이죠.


예전엔 매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게 즐거웠다. 혼자서 아웃렛의 층층마다 들러 유행하는 스타일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솔직히 이젠 귀찮기만 하다. 미니멀리스트의 정체성이 '파란색'이라면 나는 대충 '하늘색'쯤이 되었나. 쇼핑을 하기 위해 하루를 써야 하는 게 매우 아까우니 말이다.


기왕 하는 쇼핑, 까다롭게 고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가 없다. 할인하는 제품 중에서 색깔과 재질과 사이즈 모두 맘에 쏙 들어야 한다. 매장마다 돌아다니며 반팔 두 개, 얇은 긴팔 하나를 골랐다. 날카로운 나의 눈에 합격한 귀한 몸이시다. 바지도 살까 하다가 맘에 차는 게 없어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런데 올해 유행은 니트인가 봐!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는 여자 여자 한 옷들. 다른 건 욕심이 안 나는데 딱 니트 한 장만 사고 싶었다. 통바지나 청바지에 받쳐 입으면 예쁘겠는걸. 전형적인 충동구매의 덫. 나는 단아한 줄무늬 니트 티를 집어 들고야 말았다. 가격까지 저렴해서 차마 떨치기가 어려웠다. 도서관이나 복지관에서 강의할 때 입자. 언제나 핑계는 있지요.



아까부터 다리가 아팠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쇼핑 목록엔 외출할 때 신을 신발도 적혀있었다. 평소 굽이 낮은 단화를 즐겨 신었는데 밑창이 다 떨어졌다. 새 걸 장만할 시기였다. 로망이던 흰색 운동화를 살까, 아님 다시 발 편한 단화를 살까. 오우 흰색 단화가 있네? 끈이 고무밴드로 만들어져 신고 벗기가 편했다. 내 발 모양에 잘 맞아 맞춤 신발 같았다.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얻은 기분이었다. 나는 얼른 모시고 왔다.


드디어 전철을 타고 우리 동네로 컴백. 이젠 집에 가면 되나? 아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니까요? 이마트에 들러 프라이팬을, 다이소에서 가죽클리너를 샀다. 제주살이에서 내 집 살이로 돌아온 이후 몇 달 만에 치른 복합적 쇼핑이었다. 아 피곤하다, 피곤해.


아침에 한 시간 등산로를 걸은 게 팔천 보. 쇼핑으론 구천 보가 넘었다. 도합 만 칠천 보. 등산보다 쇼핑이 몇 배 힘들다! 집에 와 뻗어서 하는 말. "결국 미니멀리스트는 되지 못하겠어. 아니 되지 못했어." 찐 파란색 말고 그냥 연 하늘색으로 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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