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롱 미니멀리스트의 집 정리 마음 정리

허전하고 우울할 때 최고의 치료법

by 소율

한때 미니멀리즘을 동경했다. 단순한 삶을 영위하고 싶다는 욕구가 끓어올랐다. '일 년간 옷 안 사기'를 시도한 적도 있었다. 제주 일 년 살이를 하면서 '미니멀도 사치다'라며 원상태로 돌아갔지만. 최근 아들이 독립을 했다. 나는 아들의 짐을 치우고 대대적인 집 정리에 돌입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식이 떠난 허전함을 달래는 방법으론 최고였다. 집안 구석구석을 치우는 사이 마음속 감정도 같이 날아갔다. 더불어 다시 미니멀 비슷한 것, '나이롱 미니멀리스트'쯤에 가까워졌다.


제일 먼저 베란다가 레이다에 걸렸다. 걸리적거리는 선풍기를 베란다로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곳엔 등산용 배낭들과 김치통, 캠핑용 의자, 그릇 세트, 두루마리 휴지 등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김치통부터 싹 치웠다. 김치냉장고엔 총 여덟 개가 들어가는데 왜 여분이 네 개나 있는지 모르겠다(앞으로 여분 같은 건 키우지 않겠다). 이제 김장도 두 통이면 충분할 듯싶다. 김치 잘 먹는 아들이 없으니까요.


사은품으로 받았던 그릇 세트를 당근에 올렸다. 무료 나눔을 걸었더니 1분 만에 채팅이 쏟아졌다. 나는 아무나 골라 답을 보냈다. 어쩜, 우리 동네 분이었다. 한 시간 뒤 산뜻하게 그릇을 내주었다. 답례로 맛난 사과를 몇 개 받았다. 배낭들도 잘 정리해서 선반에 올리고 안 쓰는 잡다한 물건들은 버렸다.


베란다 바닥을 닦아내고 드디어 선풍기를 넣을 차례. 세 식구가 각기 쓰던 선풍기가 세 대였다. 고래 심줄 같은 신일 선풍기가 고장이 나지 않아 이십 년 가까이 사용했다. 가장 낡은 것에 딱지를 붙여 내놓았다. 두 대면 족하다. 먼지를 닦아 커버를 씌우고 베란다로 안착. 발 디딜 틈 없던 베란다가 훤해졌다.


다음은 아들 방을 남편 방으로 개조하기. 아들이 오랫동안 쓰던 매트리스와 옷장을 버렸다. 거실에 나와있던 삼단 서랍장을 옷장 자리에 넣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남편의 소지품을 서랍에 정리했다. 서랍 안은 금방 엉망이 될 테지만 상관하지 않으련다. 내 할 일은 거기까지. 벽을 차지하던 옷장 대신 낮은 서랍장이 들어가자 훨씬 방이 넓어 보였다. 당신도 이제 좀 쾌적하게 살아 보시오.


SE-79463b37-ab5c-4f77-b0f3-a816df013efc.jpg?type=w966 책상에 안착한 프린터


내 방과 거실은 동시 작업에 들어갔다. 거실은 재택근무를 주로 하던 아들의 사무실이나 마찬가지였다. 노트북과 커다란 모니터, 그 외 각종 용품들이 (예전에 내 사무실에서 쓰던 6인용) 책상을 가득 차지했다. 아들 물건이 모두 없어진 책상은 자못 광활할 정도였다. 나는 내 침대 옆에 놨던 프린터를 책상으로 옮겼다. 니 자리는 원래 여기여야 한다고. 프린터만 치웠는데도 방이 커졌다.


내 방에서 쓰던 한 줄짜리 책꽂이도 거실로 불려 나왔다. 기존 책장 옆에 슬쩍 끼워 놓았다. 통일감 있게 어울린다. 안 보는 책들도 추려서 재활용장에 내놓았다. 덕분에 책장에 책을 한 줄로만 꼽을 수 있었다. 앞뒤로 겹겹이 쌓아놓질 않아 깔끔했다. 거실 벽에 꽂아 두었던 무선 청소기는 드레스 룸으로 옮겼다. 드디어 거실이 뻥 뚫렸다. 속이 다 시원했다. 나의 소원이 바닥에 자잘한 물건을 두지 않는 것이다. 미니멀리스트의 기본적인 정리 법 중 하나다. 시야가 트이고 청소하기 쉬워서 너무 좋다.


SE-461ac3e1-76c8-11ee-aeb5-49aab7869def.jpg?type=w966 책상과 식탁만 있는 거실



드레스 룸에 대해 말하자면 사정이 조금 복잡하다. 공간이 워낙 좁아 붙박이장만 설치했다. 제대로 일인용의 역할을 할 수 없는 방이란 뜻이다. 안방, 작은방, 드레스 룸 중 나는 안방을 쓰고 남편이 작은방을 썼다. 우리는 한 방에서 같이 잠을 자지 않는다. 남편이 코를 고는 데다 내가 불면증이 심한 탓이다.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온 후로 작은방을 내주었다. 드레스 룸엔 아들의 짐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남편이 드레스 룸에 매트리스만 깔고 잤다. 남편에게 미안했지만 그는 괜찮다고 했다. 어차피 붙박이장에 남편 옷만 들어있어 크게 불편해하진 않았다. 남편이 쓰던 매트리스는 작은방의 빈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드디어 드레스룸이 본 모습으로 돌아갔다. 와, 붙박이장 문을 열기가 편해서 살 것 같다(예전엔 매트리스를 밟고 문을 열어야 했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음하하! 나는 야심 찬 구상을 실현했다. 바로 천장까지 이단 행거를 빨래대로 설치한 것. 세탁한 옷들을 옷걸이에 걸어서 행거에 넌다. 마르면 옷걸이째 바로 맞은편 붙박이장으로 들어간다. 빨래를 널고 말리고 정리하는 과정이 한자리에서 해결된다. 빨래를 너는 날은 습해지므로 제습기를 돌린다. 역시 빨래가 보송하게 잘 마른다. 좁은 거실에 볼썽사납게 빨래대를 펴놓는 일은 더 이상 없다. 빨래대가 늘 통창의 시야를 가렸다. 난 그게 정말 짜증 났거든.


너무 오래되어 버리려던 이단 원목 박스. 웬걸, 아직도 튼튼하구먼! 그 안에 화장품과 노트를 넣었다. 따로 놀던 미니 서랍장 두 개를 쌓고 미술용품과 목걸이 귀걸이 등을 정리했다. 그 위에 원목 박스를 얹었다. 색깔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깔끔했다. 나는 만족.

다음은 주방. 작아서 쓸 때마다 속이 터졌던 에어프라이기가 때마침 고장 나 주셨다. 닭 한 마리쯤은 들어가고도 남을 오븐형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가능. 우리 집 수납장보다 세로 길이가 높았다. 나는 고르고 골라 7리터 사각 바스켓형을 샀다. 꽤 깊고 큰 데다 다행히 수납장 안에 딱 들어간다.


SE-7946ec3f-76c5-11ee-aeb5-07c73bffd7e8.jpg?type=w966 가지런히 정리한 약상자


찬장에 들어있는 약상자. 약을 사는 대로 던져 넣어서 아주 엉망이다. 상자가 넘치도록 약이 수북이 쌓였다. 이건 세심한 정리가 필요해. 일단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자리를 잡았다. 나는 약을 전부 주방 바닥에 쏟았다.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은 쓰레기통으로 직행. 나머지는 종류별로 투명 지퍼백에 담아 글씨를 썼다. 위, 장, 감기, 진통제, 밴드, 코로나 검사 등. 물건 찾는데 젬병인 남편조차 한눈에 꺼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일주일 내내 집만 치웠다. 다른 일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매일 버리고 재배치하고 닦았다. 집안이 정리되면서 차차 마음도 정돈되었다. 아들은 결혼이라는 새 길로 들어섰다. 나 또한 삶의 다음 단계를 맞이했다. 자식에게나 엄마에게나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닌가. 지금부터야말로 진짜 나 자신으로서 인생이 펼쳐진다. 숙제처럼 살지 말고 재미있게 살고 싶다. 날마다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일상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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