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걷는 법
저녁 산책이 늘었다(조금 반했나)? 아침에 바쁘거나 너무 피곤해서 걷기를 건너뛰는 날, 해 질 녘에 나간다. 초여름의 날씨, 아침저녁이 서늘해 다행이다. 장마철엔 너무 습해서, 한여름엔 새벽 6시부터 해가 불타서, 바깥에서 걷기란 고역이 된다. 아직은 아직은 괜찮다.
월요일.
저녁 6시 30분 기온은 23도. 시원한 바람에 홀려 집을 나섰다. 늘 가는 서울대공원. 아침만큼 조용하다. 코끼리 열차를 타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공원에서 아이들과 하루를 신나게 놀았을(혹은 놀아줬을) 젊은 엄빠들. 앞에선 부부가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다. 발걸음이 착착 맞는다. 누군가의 뒷모습은 그 자체로 감정을 드러낸다. 다정한 부부로구나.
매년 흐드러지던 명자꽃과 장미꽃 울타리는 한창때가 지났다. 올해는 벚꽃을 비롯해 모든 꽃들이 일찍 피었다. 그리고 그만큼 서둘러 졌다. 호수를 돌아 메인 잔디밭으로 왔다. 전철역이나 주차장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지점이다. 관악산 뒤로 해가 꼴딱 넘어간다. 억지로 물러간다는 듯 여전히 강렬한 빛을 내뿜는다.
투정 부리고 떼써봐야 소용없다. 곧 해는 사라졌다. 엄정한 자연의 이치다. 해가 보이지 않는다고 금방 깜깜해지진 않았다. 남은 빛과 대조되어 어두운 산세가 오히려 선명해졌다. 심지어 반대쪽엔 아직 푸른 하늘이 건재하다. 해는 역으로 바람을 통해 존재감을 뽐낸다. 거봐라, 내가 없으니 바람이 싸늘하지? 우리 동네로 넘어가는 산길에 다다랐다. 이제야 숲길이 어둑해졌다. 시야가 보일 때 얼른 집에 가야겠다.
일요일.
저녁 7시. 낮에 소나기가 왔다. 공기 중엔 습기가 가득하다. 서울대공원에 들어서면서부터 벌써 이마에 땀이 흐른다. 반대쪽으로 돌아가는 방문객들과 나처럼 들어가는 동네 사람들이 스쳐간다. 누군가의 특별한 나들이와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이 공존한다. 호수 앞에 놓인 운동기구마다 한 사람씩 달라붙어 있다. 하나 둘 셋, 구령을 붙이며 다리를 힘차게 흔든다. 엄청 열심인걸? 나는 어쩐지 길가의 운동기구에 관심이 없다. 그저 걷는 데 집중한다.
서울랜드 앞에서 신기한 분홍색 구름이 나타났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알록달록한 서울랜드 성과 호수에 비친 반영, 그 뒤의 푸른 산자락 그리고 하늘에 둥실 뭉게구름. 동화책을 옮겨 그린 것 같았다. 오늘 계를 탔구나! 항상 이런 풍경에 당첨되진 않으니까. 비 온 뒤의 청명함과 해 질 무렵의 나른한 빛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저 분홍 구름임을 확신했다. 나는 자리를 옮겨가며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서울랜드를 뒤로하고 길 따라 왼쪽으로 방향을 꺾는다. 바람의 구역에 도달했다. 겨울엔 거센 바람에 어깨를 움츠리고 여름엔 시원해서 가슴이 저절로 펴지는 곳. 지금(6월)은 물론 바람 덕에 한결 걷는 맛이 난다. 내일부턴 반바지를 입어야 하나? 양말 신고 트래킹화 신은 발이 답답하다. 여름은 여름인 게야.
오늘은 왔던 산길로 넘어가지 못하겠다. 숲은 이미 어두워져 버렸다. 나는 오랜만에 아랫동네로 향한다. 문원동은 아래와 위,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예전엔 아랫동네를 문원 1단지, 윗동네를 문원 2단지라 불렀다. 현재는 문원 공원마을과 문원 청계마을로 이름을 바꾸었다(아마도 시청에서). 나같이 오래 산 주민은 여전히 옛날 이름이 입에 익다. 두 동네 모두 서울대공원과 청계산으로 연결된다.
울타리 너머엔 야구장이 보였다. 아들이 꼬마 적에 야외 수영장이었던 자리다. 이름이 복돌이 수영장이었다, 하하하. 수영장이 문을 닫은 이후로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무언가 들어서긴 했는데 또 금세 문을 닫았다. 최근 몇 년 전에야 야구장이 생겼다. 야구 동호회들에게 대여를 해주는 것 같았다.
문원 공원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널찍하게 정비를 해놓았다. 줄줄이 가로등이 빛나 환하다. 내가 아랫동네에 살던 10년 전만 해도 이 길은 좁고 어둡고 무서웠다. 가로등이 두어 개밖에 없는 데다 그마저 툭하면 꺼져 있었다. 나는 시청 민원 게시판에 고장 난 가로등을 고치고 개수를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민원이 해결되진 않았다. 이젠 흠잡을 데 없는 길이 되었네.
해가 진 뒤 산책하는 가족들. 아이들은 종알종알 떠들고 강아지도 쫄래쫄래 따라간다. 보기 좋다. 바야흐로 밤 산책자가 늘어나는 시기에 들어섰다. 나는 곧 아랫동네에 다다랐다. 산 근처 마을이 으레 그렇듯 오르막에 자리 잡았다.
거꾸로 내려가는 길은 한결 편안한 법. 오르막과 내리막은 사실 한 몸이다. 기쁨의 오르막 끝엔 내리막이 있고 고통의 오르막 끝에도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다. 솟은 언덕들 사이로 평지도 있을 테고. 생이란 한 가지 모습으로 흐르지 않는다. 오르락내리락 굴곡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서퍼가 파도 타듯 인생을 즐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단순하게 한발 한발 내디뎌 걷는 것이 나만의 비법 아닌 비법. 그래서 오늘도 걷. 는.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