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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Jan 09. 2024

으스스하고 웅장한 시키나엔에 반했다

<오키나와 여행 2023. 12. 10 ~ 13>


류큐 왕국의 별궁인 시키나엔까지 한 시간 정도 걸었다. 구글맵은 나에게 자꾸 언덕길을 올라가란다. 나하성도 높은 지대에 있었다. 옛날 왕들의 거처는 모두 백성이 접근하기 힘든 곳에 자리를 잡았다. 네팔과 캄보디아의 신전이나 사원도 대부분 수많은 계단을 오른 후에야 다다를 수 있다. 마찬가지 계산법일까? 높디높은 신이나 왕을 만나기 위해선 허리를 굽히고 수고를 해야 한다는.



북적대는 국제 거리보다 나는 나하 성이 있는 동네가 좋았다. 언덕배기라 바람이 시원하고 골목도 깨끗했다. 주민들이 보이지 않아 썰렁한 것만 빼면 훨씬 쾌적했다. 비는 그쳤지만 날은 여전히 흐렸다. 그래서 더욱 걸을 맛이 났다. 시키나엔 근처에 왔을 때 구글맵 씨가 갑자기 묘지 안으로 들어가란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어둠침침한 날에 묘지를 가로질러 목적지로 가라고? 진심입니까? 내가 그렇게 순진(혹은 멍청)할 리가.


나는 묘지 바깥을 뱅 돌아 시키나엔의 주차장을 발견했다.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매표소가 있었다. 표를 파는 분이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어요, 하니 그녀는 활짝 웃었다. 무척 반가워하며 한글로 쓰인 리플릿을 건넸다. 어쩐지 한류 팬일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시키나엔은 입구가 웅장했다. 팔을 잔뜩 벌린 아름드리나무가 줄을 섰다. 몸통에서부터 갈라져 땅을 감싼 뿌리들이 서로 얽혔다. 제주도 곶자왈에서 흔히 보던 나무들과 닮았다. 남국의 섬끼리 서로 통하는 걸까. 오랜 세월을 버티고 지켜낸 나무에서부터 나는 반했다. 입구가 이리 멋지면 벌써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다. 나무 아래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시키나엔이 마음에 들었다. 음침한데 고상한 분위기가 있어!



연둣빛 호수가 가운데 있다. 아마 맑은 날이 훨씬 예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원하고 으스스한 오늘, 신이 났다. 나에게 이상한 취향이 있었네. 호수엔 다리가 두 개. 제주의 현무암과 비슷한 울퉁불퉁한 회색 돌다리가 또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리 위를 걷다가 걸터앉아 바람을 쐬었다.



다리 맞은편 호수 가장자리에 왕족이나 사절들이 묵었던 궁이 있다. 호수 건너에서 바라보니 고즈넉하다. 아까 저길 먼저 갔어야 했는데 다리에 홀려서 정신을 놓았군. 되돌아간 궁궐,이라기엔 소박한 집. 오 신발을 벗고 방 둘레 복도를 걸을 수 있게 해놓았다. 다다미가 깔린 방이 꽤 여러 개인데 미로처럼 돌고 돌게 되어 있다. 방에서 바라보는 호수 전경이 근사했다.  


궁을 나와 주변을 산책했다. 방향이 표시되어 있어 그걸 따라 걸으면 된다. 요리조리 오솔길을 짜임새 있게 연결시켰다. 시키나엔은 일종의 작은 숲이었다. 제법 나무가 우거진 곳은 마치 제주도의 곶자왈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비슷하게 생겼다니까요. 나는 숲길이 끝나는 게 아쉬워서 두 번을 돌았다. 세 번은... 좀 너무하지? 그만 시키나엔과 이별할 시간이구려.


숙소까지 가는 길을 검색했다. 버스가 있네! 바로 앞에서 타면 된다. 내리는 정거장은 익숙한 겐초마에. 나는 버스에 올라타기 전 기사님께 "겐초마에?"라고 확인했다. 좀 더 정중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일본어를 몰라요. 여행자라는 철판을 깔고 단순하게 의사소통을 하련다. 버스 안에선 안내 방송이 나왔다. 내리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호텔에서 쉬다가 꼬치집으로 가자고요. 아까 오전에 우연히 만난 의왕 수강생 부부와 7시에 저녁을 먹기로 약속했다. 나는 일찌감치 6시 20분쯤 나갔다. 이럴 수가! 가게 문은 닫혔고 대신 하얀 종이가 붙어있다. 뭐라고 쓰여있는데 해석은 구글 렌즈의 몫. 렌즈 씨가 알려주길 '금일휴업'이란다! 하필 화요일이 노는 날일까요?? 이유는 알 수 없다. 주인장 맘이겠지. 길에서 7시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부부의 연락처도 모른다. 나는 돌아섰다.


엄청난 우연의 주인공 의왕 부부님도 7시에 허탕을 쳤을까? 아님 애초에 다른 식당으로 가셨을까? 내키면 오시고 꼭 안 오셔도 된다고 했다. 그들이 과연 왔을지 안 왔을지 영원한 수수께끼가 되었다. 뭐 이런 게 여행의 재미렸다. 하하하.    


결국 마지막 날 저녁밥은 류보 백화점 식품매장에서 사 온 튀김과 편의점의 과자, 오리온 맥주로 마무리했다.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며 먹고 싶었다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여행의 속성임을 잘 안다. 혼술도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류보 백화점을 지하에서 꼭대기층까지 구경했다. 돌발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가 여행자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여행을 누리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캬캬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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