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걷기 좋은 계절이다
<2015년 9월 18일>
놀바덱스(타목시펜)를 먹은 지 3년 5개월째. 놀바덱스는 항호르몬제로 재발률을 낮춰주는 유방암 치료약이다. 보통 5년을 먹는다. 과연 치료약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수많은 부작용을 일으키긴 하지만. 적어도 내겐 그렇다. 이 약을 먹자마자 찾아온 첫 번째 부작용은 지독한 불면증. 할 수 없이 수면유도제를 처방받아먹었다.
3년째 되는 작년부터는 골다공증이 찾아왔다. 두 번째 부작용이다. 역시 병원에서는 골다공증 약을 주더라. 거기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졌다. 세 번째 부작용. 이건 아직 약을 먹지는 않지만 의사는 이 수치가 계속되면 또 약을 주겠단다.
에헤라 올해 초부터는 소화가 안된다. 그냥 가벼운 소화불량이 아니라 매우 심각한 위장장애. 3년 넘게 이런저런 약들을 먹다 보니 원래도 약한 위장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었다. 5개월을 넘게 한약 먹고 침 맞고 운동하고 해도 차도가 없었다. 한의원을 바꿔 체질에 맞는 약을 먹으니 약간 나아졌다. 지금도 무언가를 먹고 나면 1시간 정도는 걸어줘야 조금 편안해진다. 그리고 새 모이만큼 적게 먹어야 겨우 소화가 된다. 음식을 맘껏 먹는 꿈을 자주 꿀 정도로 먹고 싶은데 못 먹고 산다. 잠 못 자는 괴로움에 못 먹는 괴로움까지 겹치니 정말 사람 미치겠다.
이쯤 되니 나도 심각하게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놈의 약을 계속 먹어야 하는 걸까??? 다음엔 또 어떤 부작용이 튀어나오려나? 이렇게 몸을 망가뜨려 가며 과연 5년을 채워야 하는 걸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끊고 싶은데 대안이 없으니.
병원 치료라는 게 참 믿음이 안 간다. 놀바덱스가 재발률을 낮춰 준다지만 세트로 딸려오는 부작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그냥 이 증상이 나오면 이 약으로 막고 저 증상이 나오면 저 약으로 막고... 부작용으로 인한 약들이 점점 늘어가고 그로 인한 소화장애는 더욱 심각해지고 악순환의 반복, 하나 의사들은 외눈 하나 깜빡 안 한다. 지난주 병원 가서 소화가 안돼서 너무 고생한다고 했더니 그럼 소화제를 처방해 주겠단다. 누군 소화제 먹을 줄 몰라서 이러나? 그리고 소화제 정도로 해결될 일 같으면 말도 안 하지. 저런 의사 노릇이라면 참 나라도 하겄네.
해서 일주일을 넘게 고심을 했다. 남편과도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했다. 놀바덱스, 이 녀석을 그냥 이쯤에서 끊어 버릴까. 혹시라도 나중에 안 좋은 일 생기면 다 감수할 수 있을까? 괜히 5년 채우지 않아서 이런 일 생겼다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편으로 약을 안 먹는 세상을 상상하니 그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 같았다. 항호르몬제도 골다공증 약도 수면유도제도 한약도 안 먹는 세상. 그게 천국일 것 같았다. 약 없이도 잠들고 약 없이도 소화 잘 되는 꿈같은 세상. 그 유혹이 얼마나 달콤한지 거의 결심을 할 뻔했다.
거기다 내년 봄에 예정하고 있는 유럽여행. 마일리지로 항공권을 해결할 수 있어서 아주 좋은 기회다. 기왕 가는 거 유럽을 한 바퀴 돌고 싶었다. 남유럽으로 들어가서 북유럽으로 나오는 3개월 일정. 2011년도 여행 이후로 다시 계획하는 장기여행이다. 약 없이 그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홀가분한지! 아마도 난 날아다니리라.
그래, 이쯤에서 이 넘의 놀바덱스, 고만 던져 버리자. 이후에 재발이 되더라도 그건 운명이겄지. 5년 안 채웠다고 다 재발되는 건 아니잖아, 어디까지나 프로테이지일 뿐, 누가 알겠어.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5년 채워야 하는데, 가슴으로는 정말 이쯤에서 그만하고 싶었다. 사실 5년 채운다고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단지 확률이 낮아지는 것이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확률게임. 거의 99%쯤 결단을 내리고 저녁 시간을 맞았다. 늘 식탁 위에 놓여있는 놀바덱스. 저 약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데 내 손이 다시 약을 집어 들더니 결국 입 안으로 넣는다.
그리고 그제 밤에 이어 어젯밤도 잠을 못 잤다. 수면유도제를 먹었음에도 새벽 4시까지 잠들지 않는 내 몸. 약을 먹어도 종종 잠이 안 드는 날들이 있다. 뭐 별다른 이유도 없이 말이다. 그동안 수면유도제를 줄여 보려고 애를 썼지만 여전히 못 줄이는 이유가 이것이다.
아침에 잠깐 선잠을 자다 깨다 겨우 일어났다. 거실에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은 어찌 그리 파란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는 시구가 절로 떠오른다. 요가를 가야 하는데 이러 날은 실내에서 요가를 하기 싫어진다. 나는 요가 대신 걸어서 40분 걸리는 약국엘 갔다. 3개월치의 놀바덱스를 사러 말이다. 에라, 수면유도제도 못 줄이겠고 놀바덱스도 못 끊겠고 나는 그저 파란 하늘이나 실컷 보고 싶었다.
참 약국에서 생긴 일. 청년 약사가 새파랗다 못해 어려 보이는 '나 레알 신참이오' 하는 약국이다. 약을 내주며 얼마나 나를 불쌍해하던지, 나는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저... 몇 기세요?"
'보통은 이런 거 안 물어보는데.'
"아, 네 2기요."
"그래도 초기에 발견해서 다행이네요. 치료약도 있고요, 이 약 열심히 드세요."
'2기를 초기라고 할 수 있나???'
그러면서 따뜻한 쌍화탕 하나 내준다. 감사히 받았다.
무감각한 병원 의사들보다는 어리바리한 저 약사가 백배 낫네. 귀엽기도 하고 ㅎㅎ
약봉지를 들고 근처 벤치에 앉았다. 파란 하늘을 바라보니 어찌나 아름다운지. 살랑살랑 부는 바람도 사랑스럽다. 참 좋은 계절이다.
그러고는 다시 마음을 먹었다.
그래, 까짓 거, 5년 먹어준다! 소화 안되면 한약 먹고 운동하지 뭐. 수면유도제? 줄이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편하게 먹자. 어차피 호르몬제 먹는 동안에는 줄이는 거 불가능하니까. 여행에도 약 싸들고 가지 뭐. 느리게 쉬엄쉬엄 다니면 되는 거니까. 이제 3분의 2 지점 돌았어. 거의 다 와 간다. 앞으로 1년 반만 버티면 돼. 최대한 즐겁게 긍정적으로 가는 거야. 봐, 하늘도 저리 파랗잖아. 나는 한참을 앉아서 속말을 하고는 다시 40분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참 걷기 좋은 계절이다.